[시론]손봉호/당신의 한표가 역사를 바꾼다

  • 입력 2000년 4월 12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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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의 조사에 의하면 이번 총선 투표율이 60%에도 못 미칠 것이라 한다. 시민단체들의낙선운동, 후보자의 병역 납세 전과기록 공개 등으로 선거에 대한 유권자의 관심이 많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대 총선 가운데 투표율이 가장 낮을 것이라 하니 나라 일에 책임을 느끼는 성숙한 시민들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투표율 60%이하 예상 걱정▼

투표율이 이렇게 낮아지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정치권이 국민의 신임과 존경을잃은 것이 그 가장 큰 이유다. 해방 후에는 그래도 김구 신익희 조병옥 곽상훈씨 등 국민의 존경을 받는 정치가들이 몇 있었으나, 군사 독재가 너무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가가 생존할 수도, 생겨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결국 국민은 밥그릇 싸움만 하는 저질 정치인들을 불신하고 냉소하게 됐으며, 그것은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계를 멀리하는 악순환을 일으켰다. 특히 이번 선거에는 현역 의원들의 불성실한 의정활동, 후보자들의 부끄러운 탈세, 병역기피, 5범까지도 섞인 전과기록이 낱낱이 드러나자 유권자들의 실망은 한층 더 커졌고, 여야의 구태의연한 저질 선거운동은 정치를 더욱 역겹게 만들었다. 그 따위 후보자들, 그까짓 정당들은 아예 상대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민주적이 된 것이 정치적 무관심의 원인일 수도 있다. 과거 독재하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길거리로 뛰쳐나간 젊은이들은 투표참여 그 자체를 비도덕적인 타협으로 간주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높아 투표율은 비교적 높았다. 그런 절박한 상황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이젠 “나 하나쯤 기권해도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텐데 뭐” 식의 선진국형 무관심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정치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아 투표 따위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선거 날 휴양지 호텔이 모두 초만원일 것이라 하니, 오히려 선거일 휴무제도를 없애야 투표율이 올라가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투표에 불참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우선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실망을 기권으로 표시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들의 감정적 대응에 불과하다. 정계를 경고하는 효과보다는 정계의 질을 오히려 더 떨어뜨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기권하는 유권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돈 받고, 지역감정에 얽매인 자들이 던진 표가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를 발휘하고, 그런 자들은 반드시 투표할 것이므로 그들의 표가 당락을 결정해버릴 수도 있다. 기권을 가장 기뻐할 사람은 바로 돈 뿌린 후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투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권리의 포기가 아니라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의무와 책임의 유기라 할 수 있다. 지지할 만한 정당이나 후보자가 없어 실망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투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적어도 그런 분들은 돈이나 연고에 표를 팔지 않을 것이고 어느 정도 비판정신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이라도 택하고, 후보자가 싫으면 선호하는 당의 후보에게 투표해 전국구 의석수를 늘리는데 돕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최악의 후보가 당선하는 것은 막아야 하고, 그러려면 반드시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최선후보 없으면 차선이라도▼

옛날에 삼대독자를 둔 아비가 자식의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자기 아들은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 박힌털 하나(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데 털 하나 빠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나 하나쯤 기권한다고 해서 선거가 안되겠는가’도 비슷한 오류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은 아무 수고도, 희생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피땀 흘려 바친 세금, 다른 사람들이 귀여운 자식 군에 보내 지킨 안전의 덕만 보겠다는 얌체 후보자들이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권하는 유권자도 비슷한 비난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자존심을 가진 시민이라면 최악의 후보자를 당선시켜 나라에 해를 끼치는 책임유기와 구우일모의 궤변으로 다른 사람에게만 짐을 지우는 무임승차적 태도는 고쳐야 할 것이다.

손봉호<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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