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불신과 혼란의 시대 의지할건 사랑뿐

  • 입력 2000년 3월 27일 20시 12분


대만의 총통 당선자인 천수이볜(陳水扁) 곁에서 조용히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아내 우수전(吳淑珍). “약속장소에서 8시간이나 저를 기다려 준 것처럼 그는 국민과의 약속도 반드시 지킬 겁니다.” 85년 정치테러로 의심되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그녀를 화장실에 데려다 주기 위해 천은 지금도 매일 밤 두 번씩 잠에서 깬다.

가난한 수재와 부자집 딸의 러브스토리가 유달리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정치〓타락’이라는 우리네 통념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진정한 ‘사랑’에 얼마나 갈증을 느끼고 있는가를 반영하기도 한다.

혼란한 사회일수록 사랑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국가도 절대적 권위를 상실한 시대에 인간이 의지할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는 아동기의 콤플렉스로부터 현재의 사랑을 설명해내려 하지만,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사회적 변동 속에서 ‘사랑’이 이 시대의 종교요 신이 돼 있는 이유를 찾는다. 불안정한 ‘위험사회’에서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믿을 놈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플라톤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의지할 만한 조그만 공동체를 건설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멋모르고 젊음을 바쳤던 직장에서 내쫓기고, 돈을 좇아 동료도 버리고 훌쩍 떠나는 세상. IMF시대를 겪으며 우리가 배운 것은 험악한 노동시장에서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 인간이 지금만큼 혼자 설 수 있던 적은 없었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간은 이제 축지법도 쓰고 천리안도 가지게 됐다. 드디어 인간은 모든 것을 창조한다.

자원과 에너지의 한계에 부닥쳐 이루지 못한 물질 세계의 꿈은 네트워크를 누비며 가상 공간에서 실현하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조물주의 직무도 인수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진정으로 홀로 서지 못한다. 가상 공간에서조차 수많은 공동체 건설에 몰두하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태생적으로 신이 될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능력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인간들의 공동체도 변화한다는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의 사랑과 합의에서 비롯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보다 빠르고 심한 변화를 겪는다.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둘 사이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모든 합의와 계약은 인위적으로 맺은 것인 만큼 인위적으로 철회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관습이 개입하지만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개인의 자립 정도에 따라 감소되기 마련이다.

남성 노동 중심의 산업사회에서 노동력의 재생산과 재충전 단위였던 가부장적 핵가족제도도 이제 남자의 육체적 능력을 별달리 필요로 하지 않는 직종이 늘어나면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의 방향은 그 누구도 자신하지 못한다. 기존의 가족 남편 아내 아들 딸 아버지 어머지 등의 개념이 내포했던 윤리적 가치관과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무너지고 있다. 둘 사이의 합의가 자신들의 부모와 같을 리는 만무하고 동창생과도 같을 필요가 없다. 이미 부부유별(夫婦有別)이나 남녀유별(男女有別)의 ‘미풍양속’은 성 차별로 비난받고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남녀 차별 없는 이성간에 그대로 적용된다.

하지만 남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변하든, 천이 기다렸다는 ‘여덟 시간’은 둘 사이의 어떤 합의나 계약보다 우선한다.

<김형찬기자> h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