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배인준/빗나간 나라빚 논쟁

  • 입력 2000년 3월 15일 19시 21분


한나라당 이한구(李漢久)선거대책위 정책위원장이 들고 나온 ‘나라빚 위기론’에 대해 맞수인 민주당 김원길(金元吉)선대위 정책위원장도 모자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까지 역공에 나섰다. 국가부채가 최대 428조원에 이른다는 이위원장의 산술에 대해 김위원장은 “최대한 부풀린 가공숫자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악질적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정동영(鄭東泳)민주당 대변인은 “국가신인도를 추락시켜 나라를 망치려느냐”고 공박했다. 김대통령도 “국가채무는 111조원이 틀림없다”며 “이것도 우리(현정권) 책임이 아니라 과거정권 뒤치다꺼리하다 생긴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재정상황에 대해 정부여당이 너무 낙관적이라는 우려는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도 표시해왔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더 걷힌 세수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놓고 복지지출 확대론을 폈고 재정부담능력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선심정책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이 잠재적 채무까지 문제삼은 것은 선거전략 냄새도 풍기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국가과제를 공론화한 의미가 있다.

▷민주당은 확정부채뿐만 아니라 정부보증채무, 연금관련채무까지 끌어들여 나라빚을 선전하는 것은 반국가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국가신인도가 잠재부채를 덮어놓는다고 올라가고 이를 드러낸다고 떨어질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장래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을 공개적으로 검증해 해법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 뭔가를 숨기고 재정을 불투명하게 운용하는 것보다 국가신인도를 높이는 길이다. 이것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통해 배운 교훈이다. 지금은 재정악화의 책임소재만 따질 때도 아니다.

▷또 김대통령과 김위원장은 “우리나라 재정적자는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낮다”고 강조하지만 그런 단순비교는 위험하다. 더구나 미국의 경우 1998년 이후 해마다 1000억달러 이상의 재정흑자를 내면서도 2013년에는 연방정부채무를 완전 청산한다는 목표 아래 내년 예산편성의 최우선 순위를 재정 건전화에 두고 있다. 현정권이 과거정권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라면 다음 정권도 현정권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것인가. 이 나라, 이 국민은 특정정권의 것이 아니다.

<배인준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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