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33)

  • 입력 2000년 1월 25일 18시 31분


택시의 트렁크에 짐을 넣는 그를 보고 내가 투덜거렸더니 그가 대수롭지 않게 받더군요.

귀국할라구 그런다.

공분 때려치우구?

한 형, 오늘 전시두 끝났는데 내 한 잔 사지. 짐만 갖다두고 다시 나오자.

그럴 필요 없어. 집에두 술 많다. 맥주가 한 박스 있구 모젤 와인두 몇병 있다구. 귀찮은데 집에서 마시자.

내가 한 잔 산다는데두?

다음에 사.

나는 그를 억지로 이끌고 내 방으로 올라갔어요. 마리의 방을 두드려서 그네도 부르고 우리는 셋이서 조촐한 술판을 벌였지요. 우리는 가끔식 독일 말로 그리고 대부분은 우리 말로 떠들었습니다. 마리가 잔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어요.

네 개인전 축하한다.

영태도 술잔을 쳐들어 보이길래 나도 멋적게 술잔을 들어 보였지요. 마리가 말했어요.

유니 그림 중에서 마음에 드는게 있었어.

그게 뭐예요?

길다란 네모 상자 안에서 크림이 위로 솟아나와 수많은 삼각형들에 닿은…그것. 맨 마지막 모퉁이에 첫 번째 벽에 있던 큰 그림.

그건 흐느적이는 껌처럼 변모한 사람의 형상이 네모난 벽 안에서 한 손을 뻗어 두 개의 삼각형이 겹쳐진 형태의 종이로 접은 나비 같은 물체를 잡으려고 하는 그림이었죠. 네모 틀 밖에는 무수한 삼각형 날개의 나비가 가득차 있어요.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닌 것은 틀 안에서 흐느적이며 뭉개진 사람의 모양이 유일한 것이었어요. 마리는 그것을 크림 덩어리로 읽었나봐요. 나는 그네와는 달리 그림을 번역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대단히 절망적이더군.

송영태가 예의 그 단정적인 투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어떤 점에서….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너무 개인적이고, 세계는 이미 변화 시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 되었다고 그러는 모양이고.

내 상태가 지금 그래.

나하구 여행 가자.

하도 뜬금없이 나대는 친구라 좀 경계하면서 나는 되물었어요.

어딜, 서울에 가자구?

그가 부시럭대더니 뒷주머니에서 뭔가 꺼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예매권이야.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여러번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 냉전시대가 끝난 기념으로…가자.

그건 어디서 났어?

지금 여러 여행사들이 난리야. 일본 여행사에서 샀어. 단체에 끼어들면 돼.

참 지금도 알 수 없는 건 송영태가 제안해서 내가 한 가지도 거절한 일이 없었어요. 그는 나에게 자신과 시대의 각인을 찍어 남기려고 했던 건지도 몰라요. 나는 그의 손에서 티켓이며 안내 팸플릿에 소개된 시베리아의 풍경이며를 살펴 보았어요. 마리도 얘기를 듣고는 말했어요.

우리 젊은 시절에 대륙은 여러 조각으로 막혀 버렸어. 하늘도 두 세계로 나뉘어 있었거든.

나는 하는 수 없이 중얼거리고 말았습니다.

참 근사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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