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호택/'투사' 삼남매의 새천년

  • 입력 2000년 1월 24일 18시 34분


본보에 매주 수요일 실리는 ‘유시민의 세상읽기’가 인기칼럼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일반 독자들 중에는 이 칼럼의 필자 유시민(柳時敏)씨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 두 번이나 수감생활을 한 운동권학생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같다.

유씨는 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대 대의원회의장으로 심재철씨(당시 총학생회장)와 함께 서울역 시위를 주도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첫 구속됐다. 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복학했으나 곧바로 학도호국단 철폐와 총학생회 부활운동을 벌이다가 백태웅 이정우씨 등과 함께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유씨가 옥중에서 쓴 ‘항소이유서’는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되면서 민주화에 목마름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졌다.

시민씨의 누나 시춘(時春)씨는 73년 세대지를 통해 ‘건조지대’라는 중편소설로 등단한 중견 여류작가이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기식하던 동생이 구속되자 인재근씨(민주당 김근태의원 부인)와 함께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결성해 ‘구속학생 석방’을 외쳤다. 87년 6월 항쟁때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김명윤 제정구씨 등과 함께 수감돼 6·29선언이 아니었더라면 오래 바깥세상 구경을 못했을 것이다.

시민씨의 누이 시주(時珠)씨는 대구여고 문예반장으로 문학상을 휩쓸던 문학소녀였다. 그녀는 서울대 국문과에 들어간 뒤 두 살 터울의 오빠 시민에 의해 의식화됐던 것인지, 언니 시춘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 상처받은 감수성을 내보이는 문학행위를 포기했다. 그리고 ‘활동보고서’ ‘투쟁속보’ 등을 집필하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에 연루돼 거여동 보안사에서 ‘자술서’를 썼다. 서노련의 지도자는 현재 한나라당 의원으로 변신한 김문수씨. 거여동에 연행됐던 여학생 5명중 4명이 혹독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다. 이제는 전업주부가 된 유시주씨가 쓴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신화’는 96년 출간이후 7판을 거듭 찍은 스테디셀러다.

이들 세 오누이는 경주여고 역사교사이던 아버지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분은 강제징집을 당해 소총수로 근무하던 아들(시민)에게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72년 10월유신 이후 반대자의 목소리를 짓누르고 인권을 경시하던 독재체제는 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됐다. 말 한마디, 글 한줄 때문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살던 암울한 시대였다. 이렇게 강고한 독재체제가 깨지기까지에는 학생 종교인 교육자 법조인 그리고 언론과 언론인의 희생이 컸다. 유씨의 가족사는 이 나라의 민주회복에 기여했던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민주화는 자유재(自由財)런가. 숨막히던 독재정권 시대는 옛노래처럼 흘러가버리고 민주화는 그것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른 사람들이나, 무임승차한 사람들이나 함께 향유하는 것이 돼버렸다.

세 오누이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민씨는 칼럼니스트로 필명이 높아가고 있고 시춘씨는 정당에 참여했다. 시주씨는 전업작가로 나서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고 있다.

황호택<기획팀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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