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옥/21세기는 여성이 이끈다

  • 입력 2000년 1월 12일 20시 03분


‘영계’ 타령이 ‘원조교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때까지 그러한 용어들은 유행어였지 도덕성을 포함한 단어는 아니었다. 적어도 서울 종암경찰서에 여성 경찰서장이 부임해 미성년자 매매춘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매매춘은 말할 것도 없고 미성년자 고용조차도 불법이다. 그러나 법에 의한 규정과 법 적용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원칙대로 법 적용을 강조하는 사람은 모든 조직에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새 천년이 지나도 장송곡을 틀고 사대문 안을 돌고 있는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 국가대표 선수마저 조국을 외면하게 만들었던 화성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 뒤에는 항상 부패의 자동회전문을 막아선 융통성 없는 여성 공무원이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녀들의 존재를 잊을 만하니 이제는 ‘미아리 텍사스촌’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여성 경찰서장이 나타났다. 화성 씨랜드 사건과 인천 호프집 사건의 두 여성이 말단 공무원으로 부패의 사슬을 끊는 데 중과부적이었던 데 반하여 의사결정의 요직인 여성 경찰서장의 고질병과의 싸움은 다행히 아직은 반향이 크다.

하루 이틀에 생긴 것도 아닌 오랜 고질병이 여성 경찰서장이 나타나고서야 사회적으로 주목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집안에 재가한 여성이 있거나 정조를 잃은 여성이 있게 되면 해당 집안 남성의 벼슬길이 막혔던 신분제적 성의 통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은 미성년 접대부가 50만명에 달하고 유흥산업 종사자가 150만명에 이르러 미혼 여성 6명 중 한 명은 유흥업소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다. 요조숙녀와 내놓은 여성의 금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져도 서로 덮어주는 부패의 연쇄고리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부패의 연쇄고리를 깰 수 있는 집단은 상대적으로 기존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 또는 지성의 자각에 의한 사회적 도덕성의 견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1995년 베이징 여성대회에서 주목받은 일본인 남성과 남성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여성 인신매매 문제를 제기해 인신매매된 여성들보다는 인신매매 조직, 인신매매 여성을 찾는 고객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일본인 노신사는 세계정치학회 회장과 유엔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일본의 부락 해방 연맹이 후원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운동(IMADAR)’이라는 국제단체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차별받는 ‘부락’ 집단이 여성 인신매매 문제를 제기한 것,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노신사가 해당 단체와 결합한 것 등은 군위안부 문제로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었던 한국인 대표단에 남성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20세기 동안 개발과 발전의 이름으로 국민총생산(GNP) 순위를 통해 나라의 서열을 매겼다면 21세기에는 인권지수로 국가간 서열을 매길 것이며 인권 후진국에 대해서는 주권조차 인정하지 않을 권리를 국제사회가 갖는다는 것을 1999년 워싱턴 회의를 통해 합법화한 바 있다. 자유무역 대신 공정무역이라는 새 질서를 만들기 위해 지난해 11월 시애틀에는 전세계의 수많은 비정부기구(NGO)들이 모인 바 있다. 시장을 통한 무한경쟁을 세계 질서로 받아들일수록 그에 대한 제동 장치로 인권과 평화라는 담론을 상위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새로운 세계화의 요체다.

▼ '여성할당제'채택 확대를 ▼

지난 30년간 후발 산업자본주의의 주역을 담당했던 남성다움은 평화와 인권,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고객맞춤형 생산품 시대에는 시대착오가 될 수밖에 없다. 새 시대 정신에 감응력이 높은 집단으로 여성이 부각되면서 세계 각국은 정치 영역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여성 할당제를 구체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성년자 매매춘과의 전쟁이 한 억센 여성 경찰서장의 ‘억지’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경찰서장 여성장관 여성국회의원의 수가 많아져야 하고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성할당제가 실효성 있게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 것이 20세기였다면 결과의 평등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21세기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정옥 <국제민주연대 공동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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