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2)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머리가 이미 이슬비에 젖어 있었고 얼굴도 촉촉했는데 내 눈물이 뜨겁게 느껴지더군요.

너 왜 우니?

마리가 내게 물어요. 마주 쳐다보니까 그네도 울고 있잖아요.

우리 나라가 생각나서요. 당신은 왜 울어요?

아무 느낌 없이….

그런 말이 어딨어. 술 좀 다시 줘 봐요.

그네가 건넨 병을 받아 이번에는 벌컥이며 제법 마셨어요. 혀 끝이 짜르르 하고 달큰한 맛이 남았지요. 마리가 병을 빼앗아 자기도 벌컥이며 마시고는 입을 씻으며 그랬어요.

이런 축제가 얼마 안가서 끝난다는 걸 저 사람들은 모를 거야. 하지만 인간을 제한하던 것들이 사라지는 장면은 언제나 멋져.

사람들은 제각기 와인 병이나 샴페인을 들고 와서 서로 부어 주기도 하고 장벽에 뿌리기도 하며 외치고 노래했습니다. 돌아보니 나 혼자 외국인이고 온통 서양 사람들 뿐이었어요. 남의 기쁨에 자기 설움을 운다더니. 우리는 한 시간 남짓 서있었는데 사람들은 끝도 없이 장벽 사이로 걸어 나왔습니다.

저길 좀 봐.

마리가 내 팔을 잡고 말했어요. 길 건너편을 보니까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들이며 가죽 옷을 입은 중년 사내들이 늘어서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영화에서 보았던 낯익은 동작으로 손을 비스듬히 쳐들어 보이는 거예요. 로마 군대에서 빌려온 나치식 경례 말예요. 그들은 행진곡 풍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요. 한 쪽에서는 그들에게 야유하는 소릴 질렀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하더군요.

제발 여기서 떠나자구.

마리가 사정을 하듯이 내 팔을 잡아 당겼어요. 나는 그네와 함께 인파에 떠밀리며 포츠다머 광장을 건너 갔어요. 거리 곳곳에서 연말에나 쓰는 폭죽과 불꽃을 쏘아 올리기 시작했지요.

동쪽이 올바른 사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두 서쪽의 거울이었는데, 이제는 조심성도 없어지고 멋대로 할 수 있게 된 거야.

사회주의 좋게 생각했어요?

슈타지는 나쁘지만 그 쪽 예술은 좋은 점이 많아. 브레히트도 얼마 전까지 거기 살았어.

슈타지요?

반혁명을 감시하던 비밀경찰 말야. 헌데 그게 무슨 상관이람…나에게.

하더니 마리는 이번에는 손수건을 펼쳐서 코를 풀고 다시 눈물을 닦아냈어요.

사람이 해놓은 짓들이란 게 다 그렇지.

어서 가요. 나 리이 만나기루 했어요.

그네와 나는 비스마르크 가로를 따라서 한참이나 걷다가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오이로파 센터가 있는 부다페스트 가로까지 갔어요. 길 건너편에 이선생과 몇 번 갔던 카페가 있었거든요. 카페 이름은 잊었는데 바로 길가에 있어서 햇빛 좋은 날에는 길가에 내놓은 자리에 앉아서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가 좋았지요. 비가 오고 밤이니까 모두들 옹색하게 안쪽에 몰려 들어가 있었는데 그렇게 카페가 만원인 건 처음 보았어요. 거의가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며 축배를 들고 요란하더군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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