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재벌에 맞선 개미군단 권리찾기소송「물꼬」

입력 1999-07-22 19:13수정 2009-09-2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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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려면 사외이사가 더 필요하다. 독립적인 인사를 추천한 후 주총에서 당당히 표대결을 하겠다.”

소수주주 운동을 벌이고 있는 참여연대가 다음달 27일 SK텔레콤 임시주총을 겨냥해 내놓은 주주제안이다. SK그룹 한국통신에 이어 3대주주인 타이거펀드가 “대표이사(손길승 SK회장)를 해임하겠다”며 소집한 임시주총을 틈타 소수주주들을 규합해 사외이사진(현재 11명 이사중 3명)의 견제력을 더욱 확고히 다지려는 전략이다.

98년 3월27일 13시간이나 계속된 삼성전자 주총은 한국 소수주주 운동사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고려대 장하성(張夏成)교수 등 소수주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참여연대 대표들은 삼성전자가 삼성자동차에 편법으로 지원한 자금을 추궁하며 윤종룡(尹鍾龍)사장 등 경영진을 매섭게 몰아세웠다.

참여연대가 위임받은 지분은 1%. 예전 같으면 발언권조차 얻지 못할 미미한 지분이었지만 이사회 의사록 열람신청을 거부한 경영진에게 300만원 과태료까지 물리는 데 성공했다.

삼성전자 주총에서 세를 과시한 소수주주 운동은 지난해 7월 제일은행의 부실대출로 인한 손해에 대해서도 보상을 끌어냈다. 서울지법은 “한보철강에 부실대출해준 제일은행 임원들은 400억원을 소수주주에게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고작 0.01%에 해당하는 지분으로 경영진의 전횡에 경종을 울린 쾌거였다.

올 4월에는 2% 지분을 가진 만도기계 소수주주가 “경영진이 회사자산을 외국기업에 헐값에 팔려고 한다”며 회계장부열람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소수주주들이 외자유치까지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와 함께 더욱 막강해진 소수주주의 파워는 이미 재벌그룹 지배주주에게는 무시 못할 위협이다. 98년 상장기업(12월 결산 390개사)은 97년보다 5배가 넘는 11조3000억원 적자를 냈다. 그러나 주주에게 돌아가는 배당액은 같은 기간 오히려 4000억원이 늘었다.

임원들이 손배보상 소송에 휘말리는 사례가 늘면서 ‘보험을 들어주지 않으면 임원을 사퇴하겠다’는 이사들까지 생겨났다.

현재 소수주주들이 부실 경영진에게 법적으로 취할 수 있는 대항수단은 회사를 대신해 임원들의 책임을 추궁하는 대표소송 제기권을 비롯해 △이사 감사해임 청구권 △회계장부열람권 △주주제안권 △누적투표제 등 8가지. 정부는 증권거래법 등을 개정해 이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최소지분 요건을 대폭 완화(표 참조)했다. 대주주 전횡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재벌그룹 내부감사가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대안으로 소수주주권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가 확고히 자리잡은 미국에서는 소수주주들의 제몫찾기가 상상을 넘어선다. 지난해 9월 미 연방법원은 ‘보잉사가 제때 회사정보를 언론에 알리지 않아 주식을 사게 돼 결과적으로 손해를 봤다’는 소수주주들의 소송을 본격 심리하기로 했다.

주주들은 “심각한 생산차질이 빚어졌는데도 경영진이 맥도널 더글러스(MD)와 합병을 앞두고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고의로 정보를 늦게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신제품 개발정보 등을 흘려 주가를 부풀리는 일까지 일어나는 한국 증시풍토에서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담배의 중독성이 입증되면서 천문학적인 보상을 하기로 한 필립 모리스는 지난해 6월 이 보상 건 때문에 소수주주들에게 1억달러를 따로 줬다. 주주들은 “담배 중독성이 회사 수익을 떨어뜨릴 것이 뻔한 데도 회사가 이를 오도(誤導)해 주식을 사게 했다”고 주장했고 회사는 결국 심리에 앞서 화해했다. 회계장부의 투명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미국에서는 잘못된 재무정보를 보고 투자한 주주들의 권리찾기가 한창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소수주주 제몫찾기의 이면에는 ‘합리적 경영판단 역시 존중해야 한다’는 균형감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는 75년 자회사 주식을 주주들에게 현물배당했다가 소수주주들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현물배당을 하지않고 시장에서 매각하면 2억5000만달러의 손실이 발생해 그만큼 절세(節稅)할 수 있었다는 것이 소수주주들의 주장이었다. 미국법원은 이사회의 판단이 ‘사기 불성실 강박 등에 의한 것이 아니다’며 ‘경영판단원칙(Business Judgment Rule)에 따라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다.

80년 미국 델라웨어주 법원은 철도차량 리스업체인 트랜드 유니언사 이사들이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합병승인을 하지 않았다’고 이사책임을 인정했다. 미국회사법이란 책을 펴낸 임재연(林在淵)변호사는 “‘스미스 대 밴 고콤’사건으로 알려진 이 판결이 당시 거세게 일던 인수합병(M&A)추세에 찬물을 끼얹자 법원이 회사법 관련규정을 대폭 손질해 이사의 면책범위를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세종법무법인 임재우 변호사는 “미국은 수십년동안 경영진의 다양한 의사결정을 놓고 많은 판례를 축적했다”며 “‘이사의 성실의무’ 조항 하나에 의존하는 한국에서는 경영판단 원칙을 적용하기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요컨대 주주이익 보호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받아들이더라도 사법적 판단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견해다.

재벌 지배주주의 전횡으로 환란(換亂)까지 겪은 한국 풍토에서 소수주주 권익찾기는 그 반작용으로 진행되는 인상이 짙다. 재계에서는 “다소의 위험이 따르는 대규모 투자는 사실상 힘들어졌다”며 “소수주주 운동이 대기업의 선진국 따라잡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법무법인 태평양 김성진(金成珍) 변호사는 “주식회사가 태동한 것은 해상운송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경영자의 합리적 판단에 따른 위험은 주주들이 감수해야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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