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56)

  • 입력 1999년 6월 30일 19시 59분


기초 조사를 대충 했습니다.

응 그런 거 다 내놓으라구.

작업복이 준비해둔 조서를 그에게 내밀자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옆의 다른 이에게 넘겨 주었다. 그들의 고함 소리와 경례를 뒤로 하고 세 사람은 나를 앞 뒤에서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검은 승용차가 시동을 걸어 놓은채로 대기 중이었다. 나는 뒤의 가운뎃자리에 앉고 양쪽 좌우로 두 사람이 끼고 앉았으며 중년 사내는 운전석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차가 떠나자마자 옆자리의 사내가 내 뒤통수를 쥐어 박으며 내뱉었다.

고개 숙여, 이 새끼야.

14

당신, 지금쯤 내 노트의 몇권째를 읽고 계셔요?

지금쯤은 모두 알게 되었겠지만 내가 그 해 여름 당신이 갈뫼를 떠나기 전에 학교를 휴직했던 건 은결이 때문이었어요. 차츰 몸이 무거워졌지요. 나는 이곳을 떠나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져서 아예 학교에 사직원을 내고 말았지요. 그 한 해 동안 나에게는 세월이 정지되어 있는 것만 같았죠. 아기의 생장만이 실감나는 현실이 되어 버렸거든요. 겨울이 되자 배는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러 왔구요. 다행히 교감 선생님 사모님이 하루에도 몇번씩 올라와 돌보아 주셔서 든든했지요. 참 좋은 분들이에요. 당신 잡히고나서 우리 모두가 본서와 도 지부에까지 끌려 올라가 조사를 받고 경을 쳤는데도 그이들은 우리를 원망하기는커녕 나를 위로해 주었어요. 예정은 이듬해 삼월경이었는데 우리가 갈뫼로 찾아왔던 무렵이잖아요. 처음 아기의 기척을 몸에 느꼈던 때의 찌릿한 감동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생명체를 배에 담는다는 건 음식물이 가득 들었을 때의 포만감과는 조금 달라요. 마치 내 골반과 척추 사이에 무슨 든든한 공동이 생겨서 그 가운데 뭔가 새로운 장기의 일부가 새로 생겨난 것과 같은 느낌이어요. 툭, 투둑, 하면서 그 장기가 꿈틀하고는 옆구리나 아랫배 근처를 건드리거나 차는 거예요. 진동이 내 온몸을 떨게 하면서 심장에까지 차 올라요. 어머, 살아 있잖아! 참 어처구니 없게도 혼자 중얼거려요. 움직임의 미세한 것들까지도 순간마다 느껴지고 나는 당신의 손을 끌어다 내 배에 대보았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기도 했어요. 그건 망망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가끔씩 어디선가 잔돌멩이나 물방울이 살그머니 떨어져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자잘한 파문이 점점 드넓게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나는 배에 두 손을 대고 마음 속으로 속삭여 보았습니다. 아가야, 고맙다. 그래요, 고맙지요. 내가 그 거센 비 오던 날 밤 이후로 여기 혼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해 보아요. 흔한 말로 떠난 사람은 있던 곳을 쉽사리 잊어버리지만 남겨진 사람은 빈 자리 때문에 힘들다구 하지 않던가요. 나는 배에서 울림이 전해오면 얼른 그 위에 두 손을 얹고 눈물이 핑 도는 걸 어금니 물어 꾹 참고는 씩씩하게 살아내야지 하고 결심하곤 했습니다. 밥도 한술씩 크게 떠서 아구아구 먹어 치웠구요. 사모님이 해다준 밑반찬도 접시가 하얗게 바닥을 드러내도록 닥닥 긁어 먹었어요. 세월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영화에서 시간이 지나는 걸 표현할 때처럼, 달력이 후딱후딱 떨어져 나가거나 산천의 나무들이 푸른 잎에서 단풍으로 그리고 낙엽 지고 흰 눈에 덮였다가 마른 가지에서 새 싹이 돋아나듯 한달음에 주욱 흘러가버리고 말데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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