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양건/정치인司正 여야 형평성 의식말라

  • 입력 1999년 5월 19일 19시 21분


우리 사회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숱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그 때마다 정치적 제의(祭儀)처럼 사정(司正)의 칼날이 휘둘러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처벌되었지만 그 가운데 자신의 잘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 벌을 받고도 억울해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사정의 형평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법원이 정치인에 대한 공판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사정의 형평성 문제다.

◇非理 있으면 처벌해야

보도에 따르면 법원은 비리혐의 등으로 기소된 정치인들에 대해 검찰 구형량을 그대로 선고하고 구인장을 발부하는 등 종래와 다른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불구속 기소된 정치인 중 법정 구속되는 예가 나올 것으로 예견되고 있는가 하면 그동안 정치인들의 재판연기 신청을 대부분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이를 기각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한다.

정치인 사정을 둘러싼 형평성 시비에는 서로 다른 두가지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일반 피고인과 정치인 사이의 형평성 문제다. 예를 들면 한나라당의 어떤 의원은 공천청탁 등의 대가로 33억여원을 받은 혐의가 있지만 불구속 기소됐다. 일반피고인이라면 당연히 구속됐을 액수다.

다른 한편 정치인 사정에는 여야간의 형평성 시비가 늘 따라다닌다. 지난번 서상목의원에 대한 구속동의 요청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을 때 시민단체들의 비난에 대해 한나라당이 도리어 시민단체에 항변하고 나선 것도 여야 사이의 불공평을 근거로 삼았었다. 현재 진행중인 정치인 재판의 현황을 보더라도 이같은 시비의 소지는 여전하다. 재판에 계류중인 정치인 17명의 소속 정당을 보면 국민회의 5명, 자민련 1명, 한나라당 11명으로 나타난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야당에 대한 편파사정으로 받아들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치인 사정을 둘러싼 이같은 형평성 시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말하듯 법 집행의 생명이 형평성에 있다면 형평성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남아있는 한 정치인 사정은 정당치 못한 것인가.

적어도 정치인 사정에 관한 한 형평성에 다소 의문이 따르더라도 드러난 대로 엄정히 처리될 수밖에 없고, 또 처리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중심 화두인 부정부패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다. 현재 진행 중인 정치인 재판은 한 건을 제외하면 모두 뇌물 또는 금품수수 비리에 관한 것인데 정치 권력을 이용한 이같은 정치권력형 부패가 온 사회에 미치는 폐해는 심대하다.

◇법원 태도변화 환영

정치권력형 부패는 일상적 부패에 비해 엄청난 규모를 지니는 것이 보통이며, 이것은 사회 전 구성원의 일상적 부패를 정당화하는 작용을 한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일상적 부패 쯤이야 죄가 되지 않는다는 부패 불감증을 만연시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정치인 비리는 흔히 정경유착의 형태로 나타나는 만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도 정치인 사정이 철저히 이루어져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관점에 따라서는 형평을 앞세워 정치인 사정의 문제점을 더 중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달리 볼 여지가 없지 않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현실로 입증된 이상 한 정권 아래에서 정치인 사정이 편파적으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정권에서 또다시 이전 정권을 겨냥한 사정이 반복될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나름대로 사정의 형평성이 회복될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

어쨌든 법원이 종래와 달리 정치인 사정에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이제는 정치인 사정이 검찰수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법원재판으로 다시 시작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같은 태도변화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부정부패 극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유의할 것은 법의 틀 안에서도 정치적 예지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개별 사건의 처리에서 구체적 정의를 살리는 일은 법관의 몫으로 남는다.

양건〈한양대 법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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