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대통령 격노 중심제」

  • 입력 1999년 1월 15일 19시 54분


새해들어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왔던 공직사회의 비리와 병폐에 대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격노가 잦아졌다. 대통령의 불호령이 어떻게 매듭지어질 것인지 국민은 날카롭게 주목하고 있다.

◇ 근원적 개혁의 분수령

관료기구의 병폐가 나라를 무너뜨린 최근의 보기가 구 소련일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기 시작했을 때 1차적 대상이 당과 정부의 관료였다. 이것을 보고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특파원 출신의 미국 원로 언론인 해리슨 솔즈버리는 “소련에서는 관료기구의 병폐를 이기지 못해 패퇴한 지도자가 한둘이 아닌데 이 역풍을 정복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고르바초프와 소련의 운명은 판가름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가의 분석은 정확했다. 고르바초프 역시 반개혁 세력에 밀려 쓰러졌고 그 연장선 위에서 소련 또한 무너졌다.

고르바초프와는 달리 키신저는 관료기구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대표적 케이스다. 그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부에 들어간 이후 나의 첫번째 일은 외부의 협상대상 국가와 싸우는 일이 아니라 정부 내부의 관료와 싸우는 일이었다”라고 썼듯이 백악관의 외교안보 보좌관에 취임하면서 냉전구조에 도전하는 새로운 외교를 펴기 위해 냉전시대에 길들여진 국무부 관료의 무사안일주의와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비밀외교 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신화로 남은 ‘키신저 외교’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관료기구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기구는 합법적이며 합리적인 국가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그런데도 관료 전체를 죄악시하고 문화대혁명의 이름 아래 ‘타관(打官)’을 시도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결과적으로 중국을 30년 이상 후퇴시켰다고 비난받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공직사회의 구조적이며 상습적인 비리와 부정부패를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 이번에는 반드시 근원적인 개혁이 실천되어 역사의 분수령이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 살아있는 정부 되려면

그러한 전제 아래 두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 어찌하여 대통령이 격노하고 경고해야만 아래 기관들이 움직이는가. 아무리 대통령이 국정의 정상에 선 대통령 중심제의 나라라고 해도 대통령의 질타가 있어야만 관련 기관들이 급하게 돌아간대서야 이게 어디 21세기를 준비하는 정부요, 국가라고 하겠는가. 국무총리 장차관 검찰총장 경찰청장 그리고 감사원장 등을 비롯해 책임이 큰 자리의 공직자들은, 또 국정감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국회의원들은 왜 비리를 미리 파악하지 못했으며 왜 미리 의법조치하지 못했던가.

대통령이 나서야만, 그것도 격노해야만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손을 쓰는 정부라면 그것은 이미 죽은 정부나 다름이 없다. 한국 정부는 ‘대통령 격노 중심제’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게다가 모든 일에는 ‘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마련인데 대통령의 격노가 ‘약발’이 떨어지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둘째, 대통령의 격노 수위에 맞게 실적을 과시하고자 무리한 일들이 뒤따르게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서 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상기해 보자. 꼭 30년전인 69년 유명한 여배우 샤론 테이트를 무참하게 살해한 히피 일당이 1심 재판을 받던 때 대통령에 갓 취임한 변호사 출신의 닉슨은 이러한 ‘범죄자’들을 언론이 지나치게 크게 보도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당연히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언론은 법원에 의해 유죄로 확정되지 않은 형사피의자들에 대해 범죄자라고 단정한 것은 형사피의자들의 변호권을 침해하고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3권 분립의 원칙에 도전했다고 비판했다.

◇ 공직자의식전환 시급

다시 우리의 경우로 돌아와 말하건대 대통령의 격노로 시작되고 여론몰이에 힘입어 추진되는 개혁이라면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 모든 공직자들이 지위의 높고 낮음에 메임이 없이 법과 제도에 따라 그때그때 문제를 제기하고 고쳐갈 때, 필요한 경우에는 낡은 법과 제도를 과감히 수술할 때, 그리고 공직자들이 의식의 전환을 통해 양식을 지키도록 유도할 때 개혁은 뿌리내릴 것이다.

김학준(본사 논설고문·인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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