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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월 15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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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배가 말씀하신 분이군요. 곧 나가겠습니다.
그네는 외출했다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나온듯 했다. 머리는 지진 것처럼 반곱슬로 웨이브가 되어 옆으로 빗어 넘긴 생머리가 꼬부라진채 부풀려 있었다. 엷은 화장을 했고 트렌치 코트는 단추를 잠그지 않고 좌우로 젖혀 있었으며 연한 갈색의 니트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네는 문을 향하여 정면으로 앉은 나를 일별 하고나서 똑바로 걸어왔다.
전화하신 분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한윤희라구 해요.
나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김…전우…라구 합니다.
그네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물론 본명이 아니시겠죠. 여기서 나가는게 좋겠어요.
윤희는 이쪽 의사는 묻지도 않고 먼저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차값을 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놓칠세라 바쁘게 계단을 내려가니 그네는 벌써 약국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가는 중이었다. 내가 다가 갈수록 그네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한윤희는 샛길로 접어들었는데 선술집이며 싸구려 식당들이 늘어선 시장 부근이었다. 그네가 뒤쫓아 오는 나를 확인 하노라고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어느 대포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윤희는 맨 구석 자리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나는 일부러 여유를 보이려고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걸음이 빨라요?
윤희가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고향다방이 어떤 덴줄 알아요? 바로 경찰서 앞 다방이죠. 거긴 손님의 절반이 경찰이에요. 다방 종업원들도 보고 들은 걸 전하겠죠.
몰랐습니다.
잠수 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지난 가을 부터요.
지칠 때가 됐네요.
사실, 그런 셈이죠.
저녁 드셨어요?
도바리 제 일조는 끼니를 걸르지 마라, 입니다.
그럼 우리 소주 한 병만 들구나서 가보도록 하죠.
어디루 갑니까?
오늘 밤 숙소요. 어디 다른 데 갈 곳 없죠?
우리는 묵묵히 소주 잔을 기울였다. 안주는 생굴이었고 술국도 나왔다. 그 술집의 흠집 투성이었던 고색창연한 나무 탁자 생각이 난다.
절 밑 동네에 여관이 많이 있어요. 동백장에 들어가세요. 내일 오후에 제가 갈 때까지 거기 계셔야 해요. 주말이니까 내일은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내가 근처에 가서 전화를 하면 곧장 나오세요. 참, 돈은 좀 있어요?
그네가 코트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탁자에 올려 놓았다. 나는 노름판의 돈을 따 먹듯이 지페를 손가락으로 스물스물 덮어서 집어 넣었다. 막차라 자리가 텅 빈 버스에 나는 올라탔고 윤희는 중천에 휘영청 솟아오른 달빛 속에 희부염한 자태로 서있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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