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3)

  • 입력 1999년 1월 14일 19시 10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발 밑에 흩어진 느티나무며 버즘나무의 갈색으로 변한 잎사귀들을 발 끝으로 헤적이며 걸었다. 누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그 사람 편지 가지구 있는데.

누님에게 편지했어요?

오래됐어. 한 삼년쯤 전에….

우리는 병원 건물이 멀찍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나란히 서있었다.

내일 퇴원하지?

예, 오전에 검사 결과 나오면요.

너희 자형이 데리러 올거야. 어서 들어가 보렴.

병원에 돌아가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신경 안정제를 먹고 침대에 누웠다. 담배 생각이 났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연거푸 두어 대 쯤 피워대고 싶었다. 나는 벽 쪽을 향해 돌아 누웠다. 아직은 잠이 오질 않는다.

버스 안에서는 산 길 아래 아득한 저쪽에 교회당의 종탑이며 회색의 나직한 일본식 이층 건물들이며 한옥 기와 지붕들과 새마을 슬레이트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읍내가 내려다보인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신작로는 아직 비포장도로였다. 남도의 끝자락이라 바다가 멀지않아 그런지 한 겨울인데도 바람은 훈훈하고 곳곳에 푸릇푸릇 대숲과 동백나무가 보였다. 버스 정류장의 시골식 이름인 차부에 도착했을 때엔 읍내에 어둠이 깔리고 중앙통 양편에 늘어선 점포마다 형광등과 백열등 빛이 하얗게 밝혀져 있었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구겨진 편지 봉투를 꺼내어 펼쳐들고 상점의 불빛에다 대고 끄적여 놓은 윤형의 글씨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차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묻는다. 그가 방향을 가르쳐 준다. 중앙통에서 약국 앞 삼거리까지 가거라. 거기서 오른쪽 길로 꼬부라져라. 경찰서와 교육청이 마주보고 있는 길에서 여고 가는 방향으로 곧장 올라가라. 거기가 수성리의 초입이다. 그 쯤에 방앗간이 있을게다. 나는 방앗간 앞에서 이번에는 주소를 대고 어디 쯤이냐고 묻는다. 건너편 빈 밭머리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정월 대보름 불놀이를 하고 있었다. 구멍 낸 깡통에 나무 삭정이들을 채워 놓고 불을 붙여 빙빙 돌리면 허공에 불의 동그라미가 춤을 춘다. 낮은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 골목. 안에서는 부럼을 깨먹으며 도란거리고 나직이 웃는 식구들의 따스한 음성이 고샅 길가에까지 흘러나온다. 곧 떠오른 달빛으로 돌담과 길이 선명하다. 나는 마을사람이 가르쳐 준대로 돌담의 중간 쯤에 높직하니 솟은 두 그루의 감나무 아래 발길을 멈추었다. 대문 대신 그냥 세워놓은 나무 기둥 안에 마당이 보이고 기와집 한 채가 있고 마루 아래 매어 놓은 개가 컹컹 짖었다.

누구시오?

남도 식으로 길게 일자로 지은 집의 오른편 부엌에서 아낙네가 나온다.

여고 선상님이요, 마실 나가서 안직 안들어 왔어라우.

나는 그 댁의 전화번호를 적는다.

누구라고 전하지라?

친구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근처 국밥 집에서 저녁으로 한 그릇 때우고 약국 앞에 보아 둔 고향다방으로 들어간다. 커피를 시키고 레지가 치근덕거려서 쌍화탕 바가지도 쓰고 그 집엘 찾아간지 한 두어 시간 족히 지났을 즈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우체국의 교환전화라 번호를 대주고 기다렸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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