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해인/따뜻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자

  • 입력 1998년 11월 8일 19시 43분


추수를 끝낸 11월의 빈 들판을 바라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약간의 쓸쓸한 빛이 감도는 11월엔 순례자의 마음으로 여행을 해도 좋으리라.

며칠전에는 볼일이 있어 경부선 열차를 탔는데 앞자리 뒷자리 옆자리에서 연방 울려대는 휴대전화 때문에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다른 승객을 생각해서 전화기를 진동으로 조작하고 통화는 통로로 나가 하라고 안내방송을 거듭해도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통화하는 이들을 보니 그 무딤과 무례함에 안타깝다 못해 화도 나고 슬펐다. 차안에서만이라도 전화기를 끄고 아름다운 바깥풍경을 내다보며 명상에 잠기거나 스포츠신문 대신 시집을 읽는 이들이 많은 기차 안 풍경을 상상해 본다. 벗에게 편지나 엽서를 쓰는 이들의 모습도 그려본다. 신속하고 편리한 통신수단인 휴대전화나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정성과 기다리는 기쁨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느리고 번거롭더라도▼

강원도엔 벌써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기온이 떨어져 마음마저 춥게 여겨지는 요즘, 어느 수녀는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나가 가출소녀들을 데려다 보살피는 일을 하고, 어느 수녀는 무료급식소에서 열심히 밥을 지어 노숙자들을 대접하며, 또 어느 수녀는 지체장애인 맞벌이부부의 자녀들 무의탁 노인들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이 모두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지만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웃사랑에 헌신하는 그들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나는 그렇게 큰일은 못하지만 시간나는 대로 부지런히 편지쓰는 일을 통해 작지만 소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화보다는 편지나 엽서로 감사 위로 축하의 표현을 하기로 마음을 굳혀왔다. 불쑥 전화로 급히 말하는 것 보다는 애송시라도 적어 마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더 따뜻하고 정감있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화는 상대와 시간대가 맞지 않으면 허탕을 쳐서 짜증이 나기도 쉽기에 아예 편지로 대신하면 여유있고 편하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우리 수녀원 마당 옛 유치원 자리에 자그만 ‘편지글방’을 하나 차려놓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보내오는 사연들을 분류해 짧게라도 답을 해주려고 애쓴다. 내게 있어 편지는 수도원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 주며, 자칫 좁아지기 쉬운 내 경험의 폭과 시야를 넓혀주는 창문이 되어준다. 여행을 할 때도 색연필 편지지 고운 스티커 등의 편지 재료들을 늘 갖고 다니다 보니 내 가방은 가벼울 때가 없다. 급할 땐 나도 가끔 팩스나 E메일을 이용하지만 번거롭더라도 겉봉에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며 갖는 정성스러운 기쁨과는 바꿀 수가 없다.

‘편지쓰기가 지니는 장점은 우정을 한결 실감나게 만들고 돈독하게 다져준다는 데 있다. 편지를 쓰다 보면 친구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가 훨씬 구체적인 것이 된다는 사실도 내가 알아낸 것 중의 하나다’라는 헨리 나웬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오늘도 편지를 읽고 쓴다. 수능이 얼마 안남아 너무 초조하다고 호소해온 고3학생들에게, 병상에 누운 남편 뒷바라지에 지쳐 50평생 처음으로 그림속의 바다가 아닌 실제 바다를 꼭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어느 주부에게, 자살하려고 약을 먹던 소녀시절 내가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큰 힘과 용기를 얻었다며 10년만에 소식을 보내온 독자에게, 그리고 북한의 경수로 현장에서 간절한 기도를 부탁하며 별빛 가득한 편지를 보내온 미지의 근로자에게 나는 얼굴도 모르지만 정겨운 사랑의 편지를 쓰려 한다. 마른 꽃잎과 단풍잎, 우리의 현실을 요약한 재미있는 만화도 신문에서 몇개 오려넣어야지. 편지를 받고 기뻐할 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고달픈 삶에 켜는 등불▼

이 한해가 가기전에 우리도 그동안 바쁘다고 미루어둔 감사와 사랑, 용서와 화해의 편지를 쓰자. 일주일에 한번쯤은 TV도 끄고 조용한 공간에서 조용한 마음으로 진실과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편지를 쓰자. 그리하면 바쁘고 고달프고 외로운 중에도 우리의 삶엔 따뜻한 등불 하나가 켜질 것이다.

네가 누구인가/내가 누구인가/발견하고 사랑하며/편지를 쓰는 일은/목숨의 한 조각을 떼어주는 행위/글씨마다 혼을 담아/멀리 띄워보내면/받는 이의 웃음소리 가까이 들려오네/바쁜 세상에 숨차게 쫓겨 살며/무관심의 벽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때로는 조용히 편지를 써야하리/…/사계의 바람과 햇빛을 가득히 담아/마음에 개켜둔 이야기 꺼내 아주 짧게라도 편지를 써야 하리/살아있는 동안은(나의 시 ‘편지쓰기’에서)

이해인<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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