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영장실질심사 뒷걸음

  • 입력 1998년 10월 12일 19시 06분


구속영장 실질심사율이 최근 급격히 감소했다는 소식이다. 수사기관의 영장신청이 종전보다 훨씬 신중해져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도에 따르면 피의자를 판사앞에 데려가는 시간과 인력의 낭비를 핑계로 검찰이 피의자의 영장실질심사 신청을 줄이도록 지시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간과 인력이 모자란다면 이를 확보해 제도의 취지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피의자의 권리포기를 유도하는 것은 ‘인권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지난해 1월 도입된 영장실질심사제는 검찰과 피의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재판받도록 하는 민주국가의 형사소송 구조상 지극히 당연한 제도다. 이 제도의 시행을 둘러싸고 법원과 검찰이 갈등과 마찰을 빚어오면서도 그동안 피의자 인권보호에 상당한 효과를 거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검찰은 80%대를 웃돌던 실질심사율을 줄이도록 지시해 50% 이하로까지 끌어내렸고, 경찰은 신청률을 낮추기 위해 신청의사 확인절차에서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니 기막힌 노릇이다.

오죽 답답하면 서울지법의 한 판사가 영장이 청구됐는데도 실질심사를 신청하지 않은 피의자를 직권으로 실질심사에 회부했겠는가. 판사는 가족과 경찰에까지 직접 연락해 피의자의 의사를 확인했다고 한다. 피의자는 실질심사를 신청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피의자를 위해 노력한 판사의 자세는 높이 살만하다. 검찰측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양이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검찰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수사기관에서 피의자의 권리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 관행은 큰 문제다. 권리를 알면 혜택을 입고 모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법이 운용돼서는 곤란하다. 피의자를 체포할 때도 진술거부권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알려주는 ‘미란다 원칙’이 있다. 구속하려는 피의자에게 실질심사 신청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수사기관의 의무다. 이것은 인권이 살아 숨쉬는 인권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정부방침에도 부합한다. 운동경기나 게임에서 비신사적 행위를 제재하듯 이를 지키지 않은 경우 적법절차에 어긋난 것으로 간주해 엄중히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실질심사를 받은 피의자가 안받은 피의자보다 영장기각률이 4∼5배 높다는 점은 실질심사제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방적인 수사기록만 보고 구속여부를 심사하면 아무래도 균형있는 판단을 하기 어렵다. 피의자의 자기방어 기회를 법원 문턱에서부터 박탈하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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