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벗기 게임(24)

  • 입력 1998년 8월 14일 19시 56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24)

―무서웠어. 난 겨우 스물 한 살이었어. 난 그런 일을 저지를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야. 정말 어째야 될지 몰라서 도망쳐버린거야. 오랫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았어. 그리고 군대엘 갔지. 미안해, 언제나 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내가 지은 죄를 잊을 수가 없었어.

부희가 경찰서에서 했다는 말은 마을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해 나를 팔았다.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기 때문에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나에게 남자는 당신들이 간부라고 부르는 내 아들의 아버지뿐이다.

미흔도 그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부희를 이해 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에게 부희는 영원히 독부일 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 해? 너도 그 여자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갑자기 미흔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럴 때면 늘 아연해졌다. 그 여자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 여자는 부정한 여자다. 그러나 나는 입을 더 꾹 다물고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부희라는 여자는 정말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해서 그 남자를 따라 이 깊은 산골 마을로 왔을까? 여자들은 하나의 의미를 위해서 자신의 생 전부를 긴 그림자속에 실종시켜버리는 존재들인가? 그 집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실체가 사라져버린 어떤 여자의 허구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미흔의 표정을 탐색했다. 만질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장님처럼 보지 못했던 그 공허한 얼굴. 미흔은 언제부터인가 감정이 배제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플라스틱 마스크 같이 냉담한 얼굴. 밤늦게 귀가했을 때, 나는 아직 잠자지 않는 아내와 대면할 때면 자주 불쾌감을 느꼈다. 일상적으로 학대받는 듯한 얼굴. 그 얼굴은 입을 꼭 다문 채 내 속의 죄의식을 자극했다. 어떻게 해? 이미 생을 팔아버린 뒤에는….

나는 여자로서의 차별이 있다 해도, 여자들의 삶이 남자들의 삶에 비해 더 고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여자애라는 이유로 남자 형제보다 상대적으로 더 부족한 교육을 받고 더 나쁜 조건의 직장생활을 하고, 더 적은 돈을 받으며 같은 시간 동안 일한다 해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평생 동안 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신체 구조상 아이를 낳도록 되어 있고, 가정 속에서 자신이 낳은 아이와 함께 남편에 의해 부양된다. 남자의 사회적 부역이 턱없이 긴데 비해 여자의 부역은 얼마나 관대하게 끝나는가. 그러고 나면 사적인 생활이 되는 것이다. 남자에게 사적인 생활은 끝없이 유보되는데, 여자의 삶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지만, 하지만 어떤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인가? 남자에 의해 부양되는 한 성숙한 여자의 가정이라는 것 속에… ‘이미 생을 팔아버린 뒤에는’ 이라고 말할 만큼 끔찍한 공허가. 그 여자가 남편의 부정을 발견했을 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잠을 자면서 죽어 가는 것, 바로 그것인가. 영우가 다녀간 이후로 미흔은 낮에 잠자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미흔의 수면병은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의심과 원한과 분노와 다시는 너를 믿지 않겠다는 운명적 결의가 석고처럼 굳은 데스마스크 같은 잠.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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