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이상희시집 「벼락무늬」,순수를 향한 타는 목마름

  • 입력 1998년 6월 29일 07시 51분


‘빈 침대 가득한 해변의 병원/눈 떠라, 부르는 소리/이따금 바람에 실려오고/그늘이 없어/사흘 전에 도착한 나의 병은/흰 뼈가 보인다//…너는 사랑의 흔적이 없는 청순한 환자,/꿈을 꾸어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한여름밤의 꿈’중)

시인 이상희(38)는 오래 앓고 있다.더러운 사랑에 감염돼 본 적 없어 항체조차 갖지 못한 아이처럼 그는 ‘잠든 것인지,죽은 것인지/천천히 죽고 있는 것인지’ 모를 투병의 시간들을 버티고 있다.

아파서일까. 시를 토해내는 호흡도 짧다. 첫 시집 ‘잘가라 내 청춘’ 이후 10년만에 펴낸 새 시집 ‘벼락무늬’(민음사)에 실린 시가 47수. 그나마 두 페이지를 넘기는 시는 고작 4수다.

한숨 혹은 통증을 삼키는 비명처럼 짧은 시. 그러나 그 짧은 고백 속에서 그는 ‘당신들처럼/허공에 몸 그으며/손가락 구르는 대로 쏟아지는/음악의 광휘처럼/의자에 못박혀/밤 새우는 대로/상아(象牙)의 말을 토할 수 있다면/나를 던질 수 있다면…’(‘마르타 아르헤리치와 기돈 크레머의 앙상블에 취해’중)이라고 예술에 대한 이글거리는 열정을 토해낸다.

그를 괴롭혀온 바이러스의 정체는 기실 ‘장대비 속에서/밤, 사나운 밤/네 발로 기며 폭주족 싸우는 소리, 내가/나의 더러움에 번번이 지고마는/항복, 항복 소리, 비 소리, 비명소리/…어디에도 없던 내가/그 악야(惡夜)의 한가운데 떠 있다’(‘벼락무늬’중)는 송곳같은 자기성찰, 열정과 순수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었을까.

대형출판사의 편집장노릇을 했던 그는 병석에서 회사가 부도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현실에 무너지기보다는 여전히 ‘사랑의 흔적이 없는 청순한 환자’를 꿈꾸는 그를 ‘몽상가’라고 힐난해야할까.

발문을 쓴 선배 시인 김혜순은 이제 그 힘겨운 싸움을 그만 좀 쉬라고 말린다. 차라리 “너의 더러움에 번번이 지고 말기를 바란다”고 기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얼음처럼 곧고 투명한 무엇’을 찾는 그의 싸움에 보내는 간절한 격려에 다름 아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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