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 시대 ⑪/문화개방]고유문화보호 안간힘

  • 입력 1998년 5월 6일 07시 33분


작년 10월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일본영화 ‘하나비’가 상영됐다. 일본의 영상물로는 모처럼 선보이는 작품이었기에 관객들은 유난히 호기심을 보였다.

일에 미쳐 살다가 가정에서 버림받는 아버지를 그린 하나비는 관객들에게 영상미와 함께 가슴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평론가들도 “일본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하기엔 아까웠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관람한 사람은 부산시민 일부와 다른 지방에서 원정온 극성 영화팬 일부로 국한됐다. 일본영화가 우리 시장에 개방되지 않은 때문.

같은 시간 전국 수만개의 위성안테나는 일본 NHK 위성방송의 두개 채널 전파를 흡입하고 있었다. 영화 가요뿐 아니라 가부키 노(能) 등 일본 전통공연물도 국경없이 안방으로 파고들었다.

이른 저녁 국내TV방송 채널도 마찬가지다.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는 어린이들 앞으로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비롯한 일본제 만화영화가 다가온다.

“어느 나라 거냐구요? 일본거라면서요? 어때서요?”

어린이들은 요정들의 늘씬한 다리에서 눈길도 떼지않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한국과 일본. ‘가까워지기엔 풀어야 할 해묵은 숙제가 너무 많은 사이’라고들 말한다. 일본 문화상품에 대해 우리가 빗장을 걸어놓은 것도 과거의 침략자에 대한 우리의 방어본능이 반영돼있다.

최근 정부가 일본 문화개방 의지를 밝혀 개방의 속도와 폭이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우옥(金雨玉)연극원장은 ‘단계적이거나 제한적이 아닌 의연한 개방’을 주장한다. 개방 초기에 호기심 때문에 수요가 크게 늘더라도 곧 안정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

태흥영화사 이태원(李泰元)사장은 “일본 문화개방은 시대의 대세”라면서도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원을 주문한다. 기금을 설치해 문화제작자가 장기적으로 결실을 보도록 지원하라는 것이다.

세계를 보자. 80년대 중반 공산권 붕괴 이후 ‘문화 빗장’은 국제사회에선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랍권과 북한 등 일부지역에 국한된 특수현상일 뿐이다. 전파개방과 인터넷의 시대에 문화장벽의 효과가 있을지 의문스러운 게 현실이다.

‘아르테(예술이라는 뜻의 라틴어)’는 최근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으로 설립한 TV채널. 케이블과 공중파로 운영되는 이 채널은 과거 여러차례 총칼을 맞대고 싸웠던 두 나라의 ‘문화적 화해’를 상징한다. 유럽 전역의 공연 전시가 이 채널을 타면서 유럽의 문화적 자부심도 드높아갔다.

두 나라의 문화교류는 다양하다. 작년에만 7편의 극영화를 공동 제작,상영했다. 공연물 영화 가요 TV프로그램의 국경없는 이동이 국제적인 문화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한 사례일 뿐이다.

상품이나 서비스 시장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활짝 개방하는 것이 문화부문의 글로벌 스탠더드라면 세계챔피언 후보로는 미국 문화가 꼽힌다. 자본과 노하우 등으로 문화산업에서 압도적 우위에 서 있다.

그래서 세계 여러나라는 문화부문에 관한한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의 진입을 두려워한다. 세계에서 진행중인 총성없는 문화전쟁에서 미국은 공격하고 다른 나라들은 방어하는 형태다.

올 2월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자간 투자협정(MAI)협상테이블에서도 공방전이 펼쳐졌다. MAI는 회원국들이 모든 외국인 투자에 대해 완전 자유화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협상. 미국측은 “문화부문도 투자를 완전자유화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비측의 프랑스와 캐나다는 “문화만은 예외로 하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논란끝에 결론은 내지 못하고 연기됐다.

프랑스와 캐나다는 미국의 문화 공세에 맞서 ‘장벽’이 아닌 ‘관문’들을 두루 만들어놓고 있다.

프랑스는 방송 쿼터제를 실시한다. TV 프로그램의 40% 이상을 프랑스 제작물로 채워야 하며 이를 합쳐 60% 이상은 유럽내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라디오에서는 40% 이상이 프랑스어권 나라의 노래로 채워지도록 규정돼 있다. 캐나다 국영방송 CBC도 황금시간대의 자국 프로그램 편성비율을 높여 나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95년부터 회원국이 TV프로그램을 수입할 경우 다른 회원국에서 50% 이상을 사들이도록 규정했다. 할리우드 영상물의 안방폭격에 대항하는 조치다.

한국은 어떤가. 미국 문화상품은 지금까지 별 규제 없이 몰려들어왔다. 각종 심의가 있었지만 국내 제작물보다는 수입물에 더 관대한 기현상이 빚어졌다. 일본만이 유독 금단의 영역이었다.

일본문화 개방에 관해 문화계 학계에서는 “공청회 등을 거쳐 문화개방의 구체적 계획안을 빨리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장벽이 없어진다면 관문이라도 제대로 만들자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양윤모(梁允模)씨는 ‘개방후 프랑스식 관문 설치’를 주장한다. 현행 스크린 쿼터제를 유지하고 공영방송의 한국영화 의무상영편수 등을 정해놓아 한국 문화상품의 경쟁력을 지켜나가자는 것.

정희섭(鄭熙燮)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문화정책연구소장은 ‘단계적 개방’을 외친다. 폭력성 봉건의식 등 일본문화에 들어있는 ‘독소’를 걸러낼 수 있도록 풍속과 윤리문제에 대한 일반규제가 필요하며 그 잣대는 국내와 제삼국의 문화상품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유윤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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