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오명철/IMF시대의 「역설적 행복」

입력 1998-01-19 08:14수정 2009-09-2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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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역으로 잃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것도 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된 자잘한 생의 진리다. 온 국민이 IMF 한파를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하지만 IMF시대의 ‘역설적 행복’도 있다. 대통령당선자 앞이라서 그랬겠지만 내로라 하는 재벌총수들이 작금의 경제위기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죄한 것이 우선 흐뭇하다. IMF체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택시를 잡으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 것과 아파트 내에까지 차를 몰아달라고 하면서 운전사의 눈치를 살피지 않게 된 것도 다행이다. 음식점에서 손님을 소중히 여기고 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 두말않고 주게 된 것도 반갑다. 음식값을 내리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후배들에게 구내식당 점심 한끼를 사면서 “오늘 과용하셨네요”라는 인사를 듣는 것도 조금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집에서 가장(家長)대접을 받게 된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가장이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에 별 관심이 없던 집사람이 조석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도 반갑다. 밤늦게 들어가도 자지 않고 기다린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들은 안마를 해준다고 난리고 3학년짜리 딸애는 차를 끓여오느라 법석이다. 아마 제 엄마가 시켰나보다. “음식 남기지 마라” “학용품 아껴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으나 들은 체도 않던 아이들이 연필 한자루 공책 한권에도 신경을 쓰게된 것도 더할 나위없이 기쁘다. 방학이면 과외다 캠프다해서 넌더리를 내던 아이들이 집에서 맘놓고 뒹굴면서 만화책을 읽게 된 것도 흐뭇하다. 하지만 엄동설한에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런 ‘역설적 행복’마저 정말 죄송스럽다. 오명철<사회1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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