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전쟁]「절대 진리」에 도전하는 「상대주의」

  • 입력 1998년 1월 3일 08시 01분


‘…과학자는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未知)의 은자처럼 진실을 추구한다. 과학자는 혼자서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시인 W 워즈워스가 바라본 과학의 모습은 속세를 초월한 현자(賢者)가 추구하는 객관적인 절대진리 그 자체이다. 수백년전의 유럽에서나 지금의 한국에서나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가 결합하면 물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엄연한 과학이다. 누구나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반드시 그러한가.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회의하는 세기말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과학은 자유로운가. 현재 서구에서는 과학이 절대적 진리라는 상식을 뒤엎는 이론이 불러온 ‘과학 전쟁(Science Wars)’이 뜨거운 이슈이다. 92년부터 과학사회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과학전쟁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날조극을 꾸며내거나 입장이 다른 교수를 임용에서 탈락시키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고 있다. 과학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한 과학사회학 과학철학자들의 상대주의적 입장은 토마스 쿤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출발해 70∼90년대에 사회구성주의, 반실재론, 페미니스트 과학비판, 포스트모던 과학 등 다양한 이론들로 구체화했다. ‘2차대전이후 미국 고체물리학의 발달은 군부의 아낌없는 지원 때문’이라며 과학에 대한 사회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부터 카오스 이론, ‘오존의 구멍은 실재하지 않으며 과학자들의 합의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극단적인 상대주의까지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그러나 각각의 이론들을 관통하는 논거는 ‘과학은 과학자들의 절충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가설의 체계’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 개인뿐만 아니라 과학의 원리 그 자체도 사회 문화의 영향력을 피해갈 수 없다는 주장이다. 과학이 지녔던 절대성의 신화를 뿌리째 뒤흔든 이같은 흐름에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자연과학자들은 90년대 들어 과학의 절대성을 옹호하며 대대적인 반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과학은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실재를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정확하게 분석 발견하는 객관적인 것’이며 ‘고체물리학을 군부가 지원하든 대학이 지원하든 그 결과는 똑같다’는 것이 자연과학자들의 주장이다. 학자들간의 논박이 공격적인 양상을 띠는 ‘전쟁’으로 비화하기 시작한 것은 ‘소칼 사건’이 일어났던 96년부터이다. 미국 뉴욕대 수리물리학 교수인 앨런 소칼은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술지에 포스트모던 과학을 지지하는 거짓 논문을 발표한 뒤 그 학술지가 출판되자마자 자신이 논문을 일부러 날조했다고 밝혔다. ‘엉터리 논문을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과학에 몽매한 상대주의적 입장의 어리석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뉴욕 타임스와 뉴스위크의 머릿기사를 장식하고 인터넷에서도 논쟁이 불붙어 과학전쟁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던 ‘소칼 사건’은 97년 ‘와이스 사건’으로 이어졌다. 소칼 교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프린스턴대 과학사 교수인 노턴 와이스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직의 후보에 올랐으나 과학자들의 반발로 인해 임용이 백지화해 버린 것. 97년에는 문제의 소칼 교수가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가들을 공격한 ‘지적 사기’라는 책을 펴내 프랑스 학계가 발칵 뒤집히는 등 과학전쟁의 파장은 날로 계속되고 있다. 사실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의 도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필 90년대에 과학전쟁이 불붙게 된 이유는 우선 냉전체계가 무너진 90년대의 특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과학전쟁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한국과학사학회지 겨울호에 발표한 홍성욱교수(캐나다 토론토대 과학기술사철학과)는 “과학에 대한 냉전 특수(特需), 거대과학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원이 끊기는 90년대에 들어서서 과학자들이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도 과학전쟁이 불붙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또 과학전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자연과학의 분야에까지 밀어닥치면서 두드러지게 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과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학전쟁의 정점을 이룬 ‘소칼 사건’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결정적이고 환원론적인 설명방식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적용한 상대주의적인 관점과 자연과학은 사회, 문화이론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필연성과 일관된 체계를 갖는 것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과학전쟁이 몇년 동안 서구 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음에도 아직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선 과학의 역사가 짧으면서도 과학적인 것에 대한 신봉이 두드러진, 한국의 특이한 과학적 풍토에서 찾아야 할 것같다. 포스트모던 과학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고려대와 중앙대 대학원에 과학학 프로그램이 생기고 전북대에 과학학과가 신설되긴 했지만 아직 과학전쟁의 전사(前史)조차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 홍성욱교수는 “한국처럼 과학이 다양한 특성을 갖는 사회에서는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하는 과학학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며 “과학학이 초기단계에서부터 자연과학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공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과학의 경쟁력조차 아직 취약한 현실에서 과학전쟁의 논점은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 국내 학자들의 의견이다. 포항공대 임경순교수(과학사)는 “젊은 과학사가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과학전쟁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과학이 절대적이라는 신념이 우세하다”며 “과학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진단했다. 과학전쟁의 ‘포연’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하는 ‘게놈 프로젝트’에 윤리적 문제를 전담, 연구하는 위원회가 설치되고 과학 프로젝트에서 3∼5%의 기금을 할당, 프로젝트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하는 등 전에 없었던 징후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치열했던 과학전쟁과 그 화해의 가능성은 학제간 통합연구의 필요성이 날로 커져가는 우리 사회에서 과학과 인문학, 두 문화의 공존과 새로운 모색을 위한 하나의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희경기자〉 ▼과학전쟁 연표▼ △92년 영국 런던대 루이스 월퍼트 교수 저서 ‘과학의 비자연적 본질’:과학사회학에 대한 과학자의 첫 반격 △93년 노벨물리학상(79년)수상자인 미국의 스티븐 와인버그 ‘최종이론의 꿈’:과학에서 철학의 무용론 주장 △93년 해리 콜린스, 트레버 핀치 ‘골렘:모든 이가 과학에 대해 알아야 할 것’:영국의 대중적 출판물인 ‘칸토’시리즈중의 하나. 과학의 사회 문화적 성격 강조 △94년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의:루이스 월퍼트와 해리 콜린스 충돌 △94년 미국의 폴 그로스, 노먼 레빗 ‘고등미신’:과학사회학 정면공격 △96년 소칼 사건:뉴욕대 물리학과교수 앨런 소칼이 학술지 ‘소셜 텍스트’의 ‘과학전쟁’특집에 논문을 기고한 뒤 일부러 엉터리 논문을 쓴 자작극이었음을 폭로. △96년 유럽과학기술사회학회와 미국과학사회학회 공동회의:과학전쟁의 무분별한 확산을 개탄하는 탄원서 채택. △97년 와이즈 사건:미 프린스턴대 노턴 와이즈 교수가 소칼을 칭찬한 스티븐 와인버그에게 반론을 제기했다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사회과학스쿨 과학학 교수직 임용에서 제외됨. △97년 10월 앨런 소칼 ‘지적 사기’: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 부정확한 과학용어를 사용해 지적인 사기를 저지르고 있다고 공격.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