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김복술/고약한 말 고마운 말

  • 입력 1997년 4월 16일 08시 03분


지난 여름 일곱살난 딸이 수두를 앓을 때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고열과 온몸에 돋아난 붉은 발진, 가려움증 때문에 아이는 칭얼대며 울었다. 뽀얗던 얼굴이 붉은 발진으로 흉하게 변했고 혓바닥과 목구멍까지 발진이 돋아 물 한모금 마실 때도 울고 짜증을 부렸다. 수두 예방주사 값이 비싸 선뜻 맞히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소아과에 갔더니 전염성이 강한 병이라고 대기실 좌석도 사람이 적은 곳으로 지정해 주었다. 혹시 옮을까봐 엄마들은 흘끔거리며 자기 아이들을 멀찍이 데려가곤 했다. 그런데 손녀딸을 데리고 온 한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의자에서 자꾸 바닥으로 내려오려는 아이에게 그 할아버지는 『말 안들으면 저 언니처럼 저렇게 보기싫게 된다』며 내 딸을 가리켰다. 그 아이는 내딸을 쳐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순간 내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세상을 웬만큼 살고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줄 모르나, 자기 손녀 귀한줄만 알고 남의 자식 상처받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다니…. 나이 값도 못하는 그 할아버지가 한심했다. 병원에서 풀이 죽어 땅만 쳐다보고 걷는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마당에 들어서는 데 마주친 동네 부인의 한마디가 또한번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곰보 앓는구나』 그날부터 아이는 밖에 나가길 싫어했고 병원에도 가지 않으려 했다. 딸은 『엄마가 예방주사 안맞혀서 이렇잖아요』라고 원망했다. 간신히 달래 병원에 다니긴 했지만 혹시 이대로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어느날 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가 던진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 작은 용기를 준 듯했다. 『저런, 장하구나. 이 더운 날에 수두를 하다니. 하지만 그런건 어릴때 앓아야 수월하게 지나가지』 좀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오는데 다시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한마디 보탰다. 『수두하네.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요즘 날씨가 그리 덥지않아 다행이다』 그 말들을 듣고난 다음부터 아이는 조금 여유를 갖는 듯했다. 그 뒤 열이 내리면서 가려움증도 사라졌고 발진도 차차 수그러들었다. 보름쯤 지나자 다시 피부가 깨끗해졌고 딸은 친구들과 다시 명랑하게 어울렸다. 아이의 눈 밑에 작은 흉터 하나를 남기고 수두는 지나갔지만 내 마음 속엔 옥수수장수 할머니와 위층 아주머니의 고운 마음씨가 아직도 커다란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김복술(서울 중랑구 묵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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