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총리가 아무리 유능한들…

  • 입력 1997년 3월 5일 19시 46분


김영삼대통령이 「처절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대국민 사과담화를 발표한 후 가시적으로 나타난 조치가 총리 경질과 개각이다. 우선 원만하고 능력있고 행정경험이 풍부한 고건씨가 새 총리로 임명됐고 여야 정치인들이 고씨의 총리 취임을 「무난한 인사」라고 보고있다. ▼ 대통령에 집중된 「힘」 ▼ 그러나 총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노동법 날치기 및 한보비리가 일으킨 분노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한자리 숫자로 떨어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기사회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방약으로 중증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나는 우리가 앓고 있는 난치병의 근원은 권력의 1인 독점이라는 제도와 관행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한 개인에 권력이 집중될 때, 설사 그가 권력을 전제(專制)화하거나 폭력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끝내는 큰 재난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권력의 집중화가 뿌리내려 민주화 시대에도 권위주의적 정치문화가 풍미하고 있다. 그래도 영명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독재자」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강한 추진력을 발휘했지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제왕적」 대통령들의 말로가 예외없이 「처절하고 참담」했다. 김대통령의 경우, 취임초 하늘을 찌르던 그 높은 인기와 신성불가침에 가깝던 그 권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대통령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의 재난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은 임기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대통령 스스로의 통치 스타일에 획기적인 결단을 내려 국민적 통합을 기하고 정부의 신임을 회복하여야 한다. 우선 김대통령은 어느 계파, 어느 정당, 어느 지역의 대통령이라는 인식을 씻고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라는 통합형 지도자로 변신했으면 한다. 여당 차기 대선후보의 「자유경선」을 공약했고 또한 노동법 파동과 한보비리를 계기로 총리를 바꾸는 마당에 사임한 이수성씨를 곧바로 당의 요직에 임명하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1년밖에 안남은 임기다. 차라리 당적을 버리고 초연한 입장의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둘째로, 기왕 여야가 기대를 거는 총리가 태어났으니, 그를 중심으로 하는 「국무회의」에 중요정책을 심의 결정케 하고 대통령이 최종승인하는 신중한 국정스타일을 종용하고 싶다. 지금까지, 대통령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행정 각부는 대통령의 지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담당하였으며, 왕왕 「어떻게 할 것인가」까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런데서 한보비리나 날치기 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통치 스타일 바뀌어야 ▼ 셋째로, 여하한 경우에도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자유로울 뿐 아니라 「공정한 조건」속에 치러야 대통령과 정부의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 돈 안쓰고 깨끗한 선거에, 필요하다면 제도적 개혁에 손을 써야 한다. 그러나 법집행기관이 엄정 중립적인 입장에 서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끝으로, 한보비리는 성역없이 진상을 밝혀야 한다. 국회 청문회에 의혹받고 있는 특정인이 왜 나올 수 없고, 이미 검찰수사로는 안되겠다는 여론인데 왜 특별검사제 도입이 안된다는 말인가. 새 총리 임명과 일부 개각에 큰 기대를 걸고 싶다. 그러나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유능한 총리도 「얼굴 마담」에 그칠 수밖에 없다. 박권상<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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