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1)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8시 15분


첫사랑〈1〉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요. 내 나이 스물두 살이 되기까지.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은 벌써 그 나이를 훌쩍 지나왔겠지요. 더러는 이제 막 그것을 지났거나, 어쩌면 나처럼 이제 막 스물두 살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해가 바뀐 어제와 오늘을 경계로, 이제 다가올 봄이면 나는 스물두 송이의 장미를 생일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러면 또 여지 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말겠지요. 누군가로부터 미리 그 꽃을 받고 그 꽃을 세듯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스물두 살이라고 입 안으로 말해봅니다. 받침 없는 나이의 부드러움이 내 몸과 마음에도 그대로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해가 바뀌는 어제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질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밤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거기에 내 나이의 어떤 경계처럼 스물두 살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요. 내 나이 스물두 살이 되기까지. 한 아저씨가 있었고, 그리고 그 아저씨가 모르는 또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고 말할까요. 지난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질 때 그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때에도 키는 지금처럼 훌쩍 컸는데 아직은 가슴이 작은 어린 여자 아이였습니다. 이제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그러니까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이 되던, 지금 같은 겨울 방학 때였을 겁니다. 지금도 나는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의 경계를 정확하게 구분합니다. 우선 그런 우리들 나이에 대해 비린내부터 떠올리는 어른들 눈엔 그 나이가 그 나이처럼 보이겠지만 막상 그 나이의 우리들에겐 한 해 한 해가 또다른 시간의 터널들입니다. 그 터널 사이에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보다 더 뚜렷하게, 어떤 아저씨가 있었고 그 아저씨가 모르는 한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아마 텔레비전 앞에서였을 겁니다. 분명 일요일이었을 그날도 여자 아이는 한 손엔 리모컨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열심히 신문을 넘기며 어느 구석엔가 있을 방송 프로그램을 찾았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그 나이의 방학이란 늘 그런 거니까. 『이젠 그런 것만 보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문을 제대로 좀 읽어라』 그 겨울, 여자 아이는 처음으로 매일 신문을 꼼꼼히 챙겨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아빠와의 약속이었습니다. 방학이랍시고 틈만 나면 텔레비전 앞에 앉는 딸이 한심해 보였는지도 모르지요. 어른들은 누구나 다 그러니까요. <글 : 이 순 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