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건 안 들어가” 갤러리 한마디에… ‘덤보 투혼’ 끓어올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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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3년8개월 부진 씻은 전인지
이번 아니어도 대회 계속 있기에… 골프 인생 현주소는 항상 18번홀
우승 갈증 길어져 부담 커갔지만, 취미 그림-아이스하키가 큰 위안
그랜드슬램 기회 잡은 것만도 감사

전인지가 11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CC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아기 코끼리 ‘덤보’ 인형 커버가 씌워진 우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덤보는 전인지의 별명이기도 하다. 호기심 많은 전인지가 귀를 쫑긋 세우고 남의 말을 듣는 모습이 귀가 큰 덤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닉네임이다. 이 인형 커버는 2016년 대만의 한 팬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성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전인지가 11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CC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아기 코끼리 ‘덤보’ 인형 커버가 씌워진 우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덤보는 전인지의 별명이기도 하다. 호기심 많은 전인지가 귀를 쫑긋 세우고 남의 말을 듣는 모습이 귀가 큰 덤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닉네임이다. 이 인형 커버는 2016년 대만의 한 팬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성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골프인생 현주소를 18홀 라운딩에 빗대 설명해 달라고 하자 전인지(28·KB금융그룹)는 지난달 자신이 우승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 18번홀(파4)을 언급했다. 세컨드 샷을 그린 근처 프린지로 보낸 전인지는 두 차례의 퍼팅 끝에 파 세이브에 성공하며 정상에 섰다.

11일 경기 성남시 남서울CC 제2연습장에서 만난 전인지는 “당시 세컨드 샷을 마치고 그린으로 다가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마주 보면서 어려운 퍼팅을 어떻게 홀에 붙여놓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18번홀이면 골프인생의 너무 후반이 아니냐고 되묻자 그는 “인생의 18번홀이 아니라 그저 오늘의 18번홀에 서 있는 것”이라며 “이번이 아니면 다음 대회가 있고 또 다음 기회가 있지 않느냐”며 웃었다. 3년 8개월에 걸친 기나긴 부진의 터널을 건너온 이의 내공이 느껴졌다.

2018년 10월 인천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이후 전인지는 우승 갈증에 오래 시달렸다. 겉으로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속은 곪아갔다. 전인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전) 골프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같은 새로운 공부를 할 생각도 한때 진지하게 했다. 기대에 빨리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코스에서 부담이 점점 커졌다”고 말했다. 그가 느끼는 부담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도 보였다. 스승인 박원 코치는 “영혼 없이 골프 치는 사람 같다. 이럴 거면 그만두라”며 충격요법을 가하기도 했다. 전인지는 대회를 앞두고 열 살 터울 언니에게 하소연의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첫날 8언더파 선두로 나섰지만 우승까지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전인지는 “‘우승 못 하면 망신’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부담감도 점점 커졌다. 4라운드를 앞두고는 새벽 1시에 눈이 떠져서 5시 넘게까지 뒤척였다”고 말했다. 우승을 확정짓는 18번홀 파 퍼팅을 앞두고는 스탠스를 취하려 왼발을 들었는데 다리가 하도 떨려 고생했다고 한다. 전인지는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아 후회는 남기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롤 모델인 아널드 파머처럼 좋은 골퍼이자 좋은 사람으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프로골퍼 전인지. 성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우승의 발판이 된 최종 라운드 11번홀(파5)의 숨은 이야기도 전했다. 전반 9개 홀에서 보기만 4개를 하며 선두와 2타 차까지 벌어졌는데 11번홀에서 이날 첫 버디를 따내며 역전 우승의 계기를 마련했다. 전인지는 “그린을 지나가는데 외국인 갤러리들이 ‘저 퍼팅 넣기 쉽지 않아’라고 말하는 게 들리더라. ‘나 넣을 수 있는데, 게임 끝난 거 아닌데’란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끓어올랐다. 결국 버디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이 올라왔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메이저 퀸’은 그렇게 자신의 통산 네 번째 투어 우승을 세 번째 메이저 트로피로 장식했다.

우승 당일 전인지는 자신이 세운 ‘전인지 LCC(랭커스터 컨트리클럽) 장학재단’부터 찾아갔다. 전인지는 2015년 LCC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고 이곳에 재단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50여 명의 학생, 주민 등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전인지는 “롤 모델인 아널드 파머(1929∼2016)가 좋은 골퍼이자 좋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나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고 말했다.

2일 입국한 후로 전인지는 12월 그림 전시회를 준비해왔다. 또 국내에 있는 동안 취미 삼아 아이스하키를 하기도 한다. 아이스하키 실력을 묻자 “팀에 민폐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며 웃었다. 꿀 같은 휴식을 보낸 전인지는 21일 시작하는 시즌 네 번째 메이저대회 에비앙 챔피언십 준비를 위해 15일 대회가 열리는 프랑스로 출국한다. 다음 달엔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AIG여자오픈(옛 브리티시오픈)에도 나선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국내 선수로는 박인비(34)에 이어 두 번째로 커리어 그랜드슬램(5개 메이저대회 중 4개 우승)을 달성한다. 전인지는 “그랜드슬램을 하면 좋겠지만 못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그저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하고 부담감을 컨트롤하면 좋은 퍼포먼스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성남=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성남=김정훈 기자 hun@donga.com


#전인지#그랜드슬램 기회#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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