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주자에 속수무책이던 초창기 야구의 균형을 잡아준 코니 맥 수비시프트 개념은 1889년 이미 등장, 과학적인 야구의 시작 100년을 이어온 혁신 기술 히트앤드런의 탄생 비화 100년 전 이미 다양한 트릭기술과 사인교환으로 인사이드 베이스볼 정착
어릴 때 동네야구를 하면 사전에 두 팀의 룰 미팅이 따로 필요했다. 이 때 반드시 들어가는 약속이 “도루는 하지 않기”였다. 투·포수의 기량이 아무래도 떨어지는 동네야구에서 도루를 허용하면 모든 주자들이 1루에 나가기만 하면 3루까지는 자동으로 갔다. 여차하면 홈도 쉽게 들어왔기에 경기가 제대로 유지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도루는 하지말자”는 약속이었다.
●폭주하는 주자들을 잡을 비책을 생각해낸 코니 맥
초창기 메이저리그에도 이런 때가 있었다. 배터리의 주자견제능력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모든 주자들은 누상을 헤집고 다녔다. 동네야구처럼 속수무책이었다. 뭔가 새로운 룰이 나올 때쯤 선지자가 등장했다. 바로 코니 맥이다. 감독으로 53년을 지내며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승(3731승3948패)을 기록했던 정장차림의 신사, 그가 메이저리그에 변화를 몰고 왔다.
1888년 내셔널리그 워싱턴의 포수였던 맥은 투수 짐 ‘메뚜기’ 휘트니와 함께 도루를 시도하는 주자를 잡아내는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당시 주자들은 틈만 나면 도루를 시도했는데, 맥은 주자가 도루를 시도하려고 하거나 리드 폭을 넓히면 오른발을 밖으로 뺐다.
투수는 이 사인을 보면 크게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주자는 당연히 2루를 향해 움직였고, 그 순간 투수는 포수 대신 1루로 공을 던졌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닌 기술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한동안 통제불능 상태였던 도루가 차츰 줄었다. 이 기술에 자주 당했던 뉴욕 자이언츠의 존 몽고메리 워드와 시카고 컵스의 킹 켈리는 곧이어 해결책도 찾아냈다. 이렇게 야구기술은 경기를 해나가면서 조금씩 발전했다.
●수비시프트 개념의 등장과 히트앤드런의 탄생
1889년 과학적인 야구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1880년대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소속으로 과묵했던 맨손 내야수로 유명했던 N 프레드 페페르가 ‘과학적인 볼’이라는 야구기술 입문서를 펴냈다. 일반상식과 당시 통용되던 대중의 지혜를 묶은 책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수비 시프트 개념이었다.
페페르는 ‘수비수 동작의 완벽한 일체’를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야수들은 던지는 공에 따라 미리 타구가 갈 방향을 예측해 움직이면 수비가 훨씬 쉬워진다”고 했다. “수비수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 바로 직전에 움직여야 효과가 크다. 동료가 어떤 움직임을 하면 그것을 커버해주는 선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알고 움직이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고 했다.
이처럼 다양한 수비방법이 쏟아지자 이를 깨기 위한 새로운 공격방식도 등장했다. 바로 100년 넘게 수명을 이어온 히트앤드런이다. 네드 핸론, 존 맥그로, 위 윌리 킬러 등이 히트앤드런을 만들어낸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다른 의견도 있다. 히트앤드런의 창시자는 1880년대의 피트 브라우닝으로, 우연히 탄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청각장애 탓에 코치의 지시를 잘 듣지 못했던 브라우닝이 어느 날 1루주자로 나가 후속타자의 초구 공략 때 2루로 뛰어간 뒤, 안타가 되자 3루까지 내달린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몰라도 히트앤드런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작전이었다. 당시 상대의 이런 플레이를 경험했던 뉴욕 자이언츠 감독 존 몽고메리 워드는 “메이저리그 17년 동안 이런 고급기술은 본 적이 없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893년 프랭크 샐리가 이끄는 내셔널리그의 보스턴은 특히 이 플레이에 능숙했는데, 신기술 덕분에 리그를 압도했다.
코니 맥.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야구 혁명가 존 맥그로가 만들어낸 다양한 트릭기술
발을 이용한 다양한 공격기술, 타자와 주자가 동시에 약속대로 움직이는 합동작전 시스템은 1890년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징하는 야구가 됐다. 이들은 희생번트와 더블스틸, 스퀴즈번트, 히트앤드런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볼티모어 촙의 탄생도 이때부터다. 특히 이런 트릭플레이를 많이 연구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존 맥그로였다. 그는 1944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내가 상대팀을 깨부수는 다양한 기술을 만들어내자 상대팀 구단주들은 새로운 규정을 내놓거나 기존의 규정을 바꿔 나와 우리 팀을 견제하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반대 흐름 속에서도 야구 기술은 발전했다.
1879년부터 1895년까지 8개 팀에서 활동했던 맨손 유격수 잭 글라스콕은 상대팀 주자가 2루 도루를 시도할 때 2루수와 유격수 가운데 누가 2루 커버에 들어갈지 미리 포수에게 사인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1892년부터 1907년까지 활약했던 유격수 몬티 크로스는 투수가 던지는 모든 구종에 따라 외야수들에게 수비위치를 미리 알려주는 사인을 처음 냈다. 그는 이 시스템을 코니 맥이 지휘하던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시절 완성했다. 스포팅뉴스는 “사인과 관련해서는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그를 평가했다. 1915년 스포팅뉴스는 “이제 대부분의 팀들이 포수의 사인을 내야수를 통해 외야수에게 전달하는 릴레이시스템을 쓴다. 필라델피아의 크로스와 시카고 컵스의 조니 에버스가 현재 야구선수들 중에선 가장 야구 IQ가 높다. 이 사인 릴레이가 제대로 이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많은 승패가 뒤바뀐다”고 썼다.
사인시스템이 발전함에 따라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에는 벤치의 번트사인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코치의 스톱사인을 무시하고 뛴 선수는 비록 결과가 좋아도 혼나거나 벌금을 물었다. 포수의 사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투수가 머리를 흔드는 것도 이때 나왔다. 이렇게 해야 포수들이 헷갈리지 않았고, 다른 선수들도 다음 공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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