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맨 앞자리 창가 01A 좌석에 몸을 실은 지 35분 정도 흘렀을까.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완도가 아마 저기 북쪽으로 가면 있을 겁니다. 부모님, 형제, 친척들 잘 지내고 계신지….” 여독도 풀리지 않았지만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만큼은 뜨거웠다. 물끄러미 바다와 육지를 번갈아 쳐다본 건 ‘돌아온 탱크’ 최경주(41·SK텔레콤)였다.
그는 16일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끝난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귀국길에 올라 인천공항을 거쳐 국내선 항공편으로 제주를 향하고 있었다. 19일 제주 핀크스GC에서 개막하는 SK텔레콤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우승 후 기자회견, 스폰서 파티 등에 참석하느라 대기시켜 둔 전세 비행기까지 놓쳤어요. 오전 2시에 잠이 들어 3시간밖에 못자고 시카고를 경유해 13시간 걸려 돌아왔죠.”
우승을 결정짓던 4라운드에 썼던 바로 그 검은색 선캡을 쓰고 돌아온 최경주에게 결정적인 승부의 순간이 궁금했다.
“연장 첫 번째 홀에서 이겼을 때 2만 V 전기에 감전된 것같이 몸이 부르르 떨렸어요. 2년 동안 우승 없이 고생했던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가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숨 막혔던 전날의 접전 상황을 복기하던 그의 표정은 아직도 필드에 있는 듯 진지해졌다. “18번홀에서 1.2m 파 퍼트를 놓칠 뻔했는데 자칫 국민적인 망신이 될 뻔했어요. 연장전을 치른 17번홀에서 데이비드 톰스가 1.1m 파 퍼트를 앞두고 있을 때는 속으로 기도했어요. 빗나가기를 원했나 봐요. 이건 진짜 쓰면 안 되는데. 허허.”
이번 대회 17번홀(파3)은 협소한 아일랜드 그린에 풍향 변화까지 심해 마의 홀로 불린다. 하지만 최경주는 “그동안 17번홀에서만 20번 넘게 쳤는데 나처럼 한 번도 물에 빠뜨리지 않은 선수는 없다더군요. 아무래도 하나님 덕분인 것 같아요.”
이번에 동행한 캐디 앤디 프로저(스코틀랜드)에 대해 그는 “고집불통이다. 그래서 더 도움이 된다. 예스맨이었다면 아마 이 자리에 설 수 없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최경주가 받은 우승 상금을 부러워했다. 단일 대회 최고인 171만 달러(약 18억7000만 원)는 어떻게 받을까. “그 액수 그대로 내 은행 계좌로 입금이 됩니다. 나중에 세금을 따로 내지요. 트로피는 모조품을 제작해 집으로 보내주고요.”
밤을 새워도 계속될 것 같던 최경주의 말문이 잠시 멈췄다. 기내방송에서는 “잠시 후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승무원의 안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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