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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3월 16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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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이’ 이봉주의 발은 상처투성이다. 성할 날이 없다. 모과처럼 울퉁불퉁하다. 발톱도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새카맣다. 한번 대회에 나가 완주하고 나면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 잘 걸을 수도 없다.
마라톤은 ‘발-발목-정강이-무릎-허벅지-골반’에 끊임없이 충격을 주는 반복 운동이다. 지루하고 단조롭다. 양발에 26개씩 있는 뼈와 골반∼발목에 이르는 5개의 뼈가 체중의 두세 배나 되는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봉달이는 너무 많이 뛰었다. 20년 동안 40번 완주는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정도다. 마라토너가 한 번 출전하려면 적어도 매주 330km씩 12주 동안은 달려야 한다. 이봉주는 42번(2번은 기권) 출전했으니 훈련 거리만도 16만6320km에 이른다. 여기에 대회 때 달린 거리와 하프마라톤 및 역전대회 출전까지 더하면 지구(약 4만192km)를 4바퀴 이상 돈 셈이다.
봉달이의 출발은 보잘것없었다. 겨우 이름 석 자를 내민 것은 1989년 제70회 전국체육대회 육상 남고부 1만 m에서였다. 1위는 강릉 명륜고 황영조가 차지했다. 기록은 30분35초. 당시 천안 광천고 이봉주는 3위(30분52초)로 턱걸이했다. 황영조에게 92.64m(17초)나 뒤졌다.
봉달이는 갈 데가 없었다. 대학이나 실업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았다. 1990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시청에 입단한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봉달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1996년 3월 애틀랜타 올림픽 티켓이 걸린 동아국제마라톤(경주)에서 2위에 오르면서였다. 당시 코오롱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갑내기 황영조는 29위(2시간29분45초)로 올림픽 티켓을 따는 데 실패한 뒤 은퇴해 버렸다. 풀코스 도전 4번째 만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썼던 마라톤 천재는 그렇게 무대를 떠났다.
봉달이는 풀코스 도전 15번 만에 애틀랜타 올림픽 2위에 올랐다. 그 뒤로도 3번(2000년 시드니 24위, 2004년 아테네 14위, 2008년 베이징 28위)이나 더 도전했지만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아시아경기 2회 연속 우승(1998년 방콕, 2002년 부산),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등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는 두루 올랐지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렇다. 봉달이는 한 땀 한 땀 달려서 꽃을 피웠다. 쪼글쪼글한 얼굴, 덥수룩한 턱수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마른 명태 같은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누가 뭐라 하든 달리고 또 달렸다.
고등학교 육상부 첫날, 테니스 바지를 입고 갔다가 모든 부원을 배꼽 빠지게 만들었던 봉달이, 전국체전 충남 대표로 뽑혀 합숙훈련을 할 때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묵묵히 혼자 트랙을 달리던 봉달이,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봉주 선수는 턱수염이 힘의 원천인 것 같은데 왜 깎고 청와대에 왔느냐”고 묻자 “어르신 앞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하고 가는 것이 결례가 될 것 같아서”라고 했던 봉달이….
이젠 봉달이가 선수로서 달리는 것을 볼 수 없다. 우리 나이 마흔. 그의 앞에는 또 다른 인생 마라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는가. 인생이라는 달리기 경주도 선수는 1명뿐이다. 그것은 늘 그렇듯이 바로 나 자신이다.
마라톤은 고행이다. 온몸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날숨과 들숨의 리듬이다. 언 가지를 뚫고 마침내 토해내는 봄꽃이다.
봉달이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 달렸다. 불의 전차처럼 쉼 없이 달렸다. 먹이를 찾아 하루 40km 이상 달렸던 네안데르탈인처럼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도끼날을 갈아 마침내 바늘을 만들었다.
“봉달아, 그동안 정말 욕봤다. 이젠 좀 쉬면서 편안하게 인생을 달리려무나.”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