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점 탐험]1월2일 34일째 "남위 87도 돌파하다"

  • 입력 2004년 1월 4일 20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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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남극의 아름다운 구름에 도취한 박영석 대장
1월 2일 남극의 아름다운 구름에 도취한 박영석 대장
날씨 : 대체로 흐림

기온 : 영하 18℃

풍속 : 초속 9.5m

운행시간 : 09:05-19:10 (10시간05분)

운행거리 : 25.8km (누계 :800.3km)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 329.9km

야영위치 : 남위 87도 02분 798 /서경 81도 55분 991

고도 : 2,172m

88도까지 남은 거리: 105.9km



▼남위 87도 돌파하다!▼

새벽바람이 심란하다. 텐트를 뒤흔드는 소리에 대원들이 새벽잠을 설친다. 다행히 블리자드 수준은 아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대원들이 느끼는 추위는 바람의 세기에 비례하는 듯 손과 발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행히 86도를 넘어서면서부터 정면에서 불어오던 마파람이 11시 방향, 10시30분 방향으로 날이 갈수록 바뀌고 있다. 어느덧 고도가 2천m를 넘어섰다. 오르막길이 계속 될 때는 산소가 부족해 숨까지 가쁘다. '바람-추위-고소(高所)' 3대악재가 탐험대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

머리 위를 맴도는 태양은 오후 6시 이후부터 가장 좋은 상태를 보여준다. 박대장은 전부터 운행 출발시간을 늦출까를 고민하다가 며칠 전부터 30분씩 늦추더니 오늘부터는 9시 출발에 맞춰 기상과 식사, 출발준비를 모두 차질 없이 하라고 대원들에게 당부한다. 출발시간을 늦춘다고 쉬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늦은 출발은 늦은 도착을 의미하고 캠프 도착 후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이 있을 뿐이다. 운행시간을 늦춘 첫날, 차가운 바람 속에서 출발준비를 한다. 대원들의 몸은 출발 전 이미 꽁꽁 얼어버린다. 추위를 잊기 위해 서둘러 출발을 한다. 설원은 보던 것과는 딴판이다. 의외로 경사가 심해서 등산을 하는 기분이다. 설원의 상태 또한 어제와 마찬가지. 눈은 단단한데 마찰이 대단해서 썰매와 스키가 잘 나가지 않는다. 기복이 심한 상태가 계속된다. 오늘도 썰매가 "나 죽겠다"고 하소연한다. "덜커덩 쿵쾅…"

처음부터 사면을 오르는 대원들이 힘겨워 보인다. 아마도 어제의 무리한 운행의 영향일 것이다. 허벅지가 온전치 않은 강철원 대원은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고 몸 상태에 맞게 꾸준히 뒤따라온다.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몸이 풀렸는지 박대장의 뒤에 바짝 따라 붙어 걷는다. 구름이 모이더니 곧 해를 가린다. 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기온의 차이이다. 해가 사라지니 추위가 바람을 타고 엄습해 뼈속까지 스며든다. 장갑도 큰 효과가 없다. 휴식시간에 간식을 먹기 위해 벙어리장갑을 벗으면 손끝의 감각을 잃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한번 잃은 손의 체온과 감각은 쉬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한참을 걸으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려도 언 손은 풀리지 않는다. 한번 당한 후에는 간식 먹기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아,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대한 사스트루기가 설원 여기저기에 성곽처럼 자리 잡고 길을 막아선다. 이럴 땐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운행시간이 이래저래 지연된다. 박대장은 괜찮아진 듯했던 설사를 연거푸 갈겨 대더니 닭 병 든 것처럼 시름시름 한다. 결국 그 후유증으로 오전 첫 간식시간 이후 이현조 대원에게 선두를 넘긴다. 먹는 것 조심하며 설사를 피 하는가 했는데 다시 재발이다. 그나마 이전보다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쯧쯧,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두 번째 간식이후 다시 박대장이 앞서며 잘 끌리지 않는 눈 상태지만 어제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대원들을 잡아끈다. 대원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 운행시간을 10시간만 하기로 정한 상태여서 그 시간 동안은 최대한 멀리 가기 위함이다. 30여일의 탐험기간을 거쳐 오면서 대원들의 몸 상태는 갈수록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틈 만나면 아귀아귀 먹어서 찌웠던 체중이 평상시 수준으로 돌아왔다. 축적해온 체지방도 거의 소모가 되었다. 그로인해 추위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져 더 춥게 느껴진다. 이런 일들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은 극점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남극점탐험대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두 가지 처방전을 준비해 왔다. '일시적이면서 효과가 빠른 양방처방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한방처방'과 같은 것이다.

하루하루 힘들고 지치고 아프고 쓰라릴 때 최고의 약발은 80도부터 단계적으로 밟아오는 매 위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오늘도 춥고 힘겨운 상황을 '87도를 넘어섰다'는 妙藥으로 치료했다. '남극점'은 神藥이다. 남극점 탐험대원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완치할 수 있는 명약이다. 이 약을 얻기 위해 남은 거리는 300km.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밤. 아침에 마실 물을 끓여놓고 스키 바인딩을 손보고 난 후 잠자리에 눕는다. 잘 가라, 깊고 춥고 푸른 밤이여.

남극점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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