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협력시대]야구,「베스트9」기량 막상막하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8시 15분


「동아〓張桓壽기자」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 일본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지낸 삼성 白仁天(백인천)감독. 프로 원년인 지난 82년 그는 MBC 감독과 선수를 겸하면서도 경이적인 4할대 타율로 첫 리딩히터의 영광을 차지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혹을 눈앞에 둔 39세. 일본에서는 한물 갔다고 평가받던 「너구리」 張明夫(장명부) 또한 이듬해 최약체 삼미에서 30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백인천씨는 재일동포 듀엣 金永德(김영덕) 金星根(김성근)감독과 함께 일본야구를 한국에 알리는데 큰몫을 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지난 91년 첫 대회에서 2승4패에 머물렀던 한국은 4년만에 다시 열린 95한일슈퍼게임에서 2승2무2패를 기록, 외형상으로는 일본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야구팀을 보유한 고교수에선 48대 4천5백으로 일본에 비교가 안되지만 한국은 베스트 멤버끼리 맞붙는 「엘리트 야구」에선 이제 한번 해볼만하다는 자긍심까지 갖게 됐다. 대회가 끝난 뒤 宣銅烈(선동렬)의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과 趙誠敏(조성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행이 성사된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비록 올해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의 「일본 공습」은 무위로 끝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1천만 한국 야구팬들은 그가 멋지게 재기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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