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호흡기 달고 임종 직전 남긴 말, 유언 효력 인정 가능”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4일 10시 15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 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 뉴스1
산소호흡기를 단 채 임종 직전 병상에서 남긴 ‘구수증서(타인이 구술한 내용을 글로 작성한 증서) 유언’ 역시 효력이 인정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단순히 녹음 방식이 가능해 보인다는 사정만으로 구수증서 유언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4일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원고가 우리은행을 상대로 청구한 예금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다.

원고의 이부형제인 고인은 증인 2명과 원고가 입회한 가운데 예금채권 3건과 주거지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 등 자기 재산 전부를 원고에게 증여한다는 취지의 유언을 구수 방식으로 남겼다.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은 질병, 그 밖에 급박한 사유로 인해 다른 방식에 따라 유언할 수 없는 경우에 유언자가 2명 이상의 증인의 참여로 그 1명에게 유언의 취지를 구수하고, 그 구수를 받은 사람이 이를 필기낭독해 유언자의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후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증인 1명은 고인의 유언을 필기한 뒤 이를 낭독했고, 변호사였던 다른 증인은 유언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당시 고인은 호흡이 어려운 상태에서 어눌한 발음으로 계좌번호 등을 겨우 말할 수 있었으며, 일부 재산의 세부 내용은 제3자의 도움을 받아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인은 유언 후 사흘 만에 숨졌다. 원고는 7일 후 서울가정법원에 유언 검인을 신청했다. 법원은 약 5개월 뒤 이를 받아들였다. 고인의 상속인들도 유언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행 측은 원고가 청구한 예금 채권 9600여만 원에 대한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그는 2022년 8월 소송을 제기했다.

민법은 질병 등 급박한 사유로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및 비밀증서의 방식으로 유언할 수 없는 경우에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을 허용하고 있다.

1·2심은 고인의 유언이 효력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고인이 당시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 등을 인지하고 말할 수 있었던 만큼 녹음 방식의 유언이 불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고인의 상태를 고려할 때 민법에서 정한 방식에 따른 유언이 객관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유언의 요식성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이유는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하게 하고,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며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요건을 판단할 때 그런 취지가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언자가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 등을 인지하고, 말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해서 곧바로 구수증서 외 방식으로 유언을 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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