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대신 계약하고 진단서 수시로 보고… 月 20만원 받고 공공후견인 누가 하겠나”

  • 동아일보

[‘치매머니 사냥’에 뚫린 방패]
은행-병원-법원 업무 등 과중 책임
‘사실상 무보수’ 열악한 처우도 문제

“월 20만 원 받고 진단서 발급부터 임대차 계약까지 도맡아야 합니다.”

지난해 서울 금천구에서 8개월간 한 치매 환자의 공공후견인으로 활동한 이모 씨(75)는 현장 상황을 이같이 털어놨다. 이 씨는 금융기관에서 수십 년간 근무해 은행 실무와 관련 법령에 해박한 전문가다. 하지만 국가가 설계한 ‘공공후견’의 틀 안에서 그가 마주한 현실은 전문가의 식견만으로 넘기 힘든 거대한 벽이었다.

이 씨의 일과는 자원봉사자의 영역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주 2회 이상 환자를 방문해 안부를 묻는 일상 돌봄은 시작일 뿐이다. 정작 고난도는 ‘재산 관리’ 업무에서 발생했다. 매번 은행을 찾아 잔액 증명서를 떼고, 병원을 돌며 진단서를 발급받아 그 내역을 수시로 법원과 센터에 보고해야 했다. 환자가 거주할 집을 새로 구하는 과정에서는 임대인과 복잡한 계약 관계를 대리하며 전문적인 법률 지식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처럼 과중한 법적 책임과 행정 부담은 후견 제도가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고질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저소득층 홀몸노인을 돕는 공공후견의 경우 후견인이 짊어지는 업무의 무게와 법적 위험은 상당하지만 보상은 자원봉사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금융기관 근무 경력이 있어 망정이지, 일반인이 교육만 받고 하기엔 법적 보호 장치가 너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이해관계가 얽히는 상황이 발생해도 후견인이 법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소송이나 계약 분쟁 발생 시 실무 대응은 후견인이 전면에 나설 수 밖에 없는 ‘독박 후견’의 구조이기도 하다.

후견 신청부터 승인까지 4개월 넘게 걸리는 느린 속도도 ‘치매 머니 사냥꾼’에게 틈을 주는 요인이다. 이 씨에 따르면 공공후견인이 법원에서 최종 승인을 받기까지는 서류 검토와 인적 사항 확인 등을 거쳐야 해 보통 4개월이 넘게 걸린다. 사냥꾼이 치매 노인의 신분증을 손에 넣고 자산을 빼돌리는 데 며칠이면 충분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의 방패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셈이다. 배광열 후견전문변호사(법무법인 온율)는 “후견인이 정해지기 전 미리 치매 환자의 돈을 다른 통장 등으로 빼돌리는 방법으로 자산을 가로채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꼽았다.

열악한 처우는 인력난을 부추긴다. 현재 공공후견인에게 지급되는 활동비는 월 20만 원이다. 한 명의 환자를 더 맡아도 추가 지원금은 10만 원에 불과하다. 업무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고려하면 사실상 ‘무상 봉사’에 가까운 셈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활동 가능한 공공후견 인력은 949명으로, 제도가 확대되기 위해선 추가 인력 공급이 필요한 상황이다.

서울에서 활동한 또 다른 공공후견인은 “재정이 빈약한 취약계층만 공공후견 대상이라는 것도 문제”라며 “최근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재산이 많아 사냥꾼의 표적이 되기 쉬운 일반 치매 노인들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후견인 외에 일반 후견인들의 경우 보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매년 법원에 치매 노인의 재산과 사용 명세를 보고해야 하는데, 어디에 지출했는지 영수증까지 일일이 첨부해야 한다. 이런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 후견인은 대부분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치매 환자#재산 관리#임대차 계약#공공후견인#치매 머니 사냥꾼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