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대신 오름으로, 친구와 뛰놀자… 아이들이 ‘자연’스러워졌다

  • 동아일보

[위클리 리포트] 지방으로 ‘농촌 유학’ 떠난 도시 아이들 일상… 서울 떠나 제주 농촌 유학 초등생
하교 후 학원 아닌 제주 곳곳 소풍… “자연이 일상” 호평에 2670명 참여
양양 바다 체험-섬진강 자전거 타기… 지역 특색 담은 현장학습으로 인기
폐교 위기 학교에 활기 불어넣어… 인구 유입 기대에 지역사회도 나서
“학교-지역 정보 창구 통일” 의견도

《농촌으로 유학 가는 도시 아이들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만 살던 아이들이 ‘농촌 유학’을 떠나고 있다. 학원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학부모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농촌 유학을 경험한 학생 수가 누적 2000명을 넘었다.》


21일 송당목관앙상블 학생들이 송당초 악기연주실에 모여 다음 달 정기연주회를 위해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
제주=김민지 기자 minji@donga.com
21일 송당목관앙상블 학생들이 송당초 악기연주실에 모여 다음 달 정기연주회를 위해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 제주=김민지 기자 minji@donga.com
“지휘를 보지 않고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하면 안 돼요. 5분 동안 집중력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봅시다. 자, 78마디부터 시작!”

21일 제주 제주시 구좌읍 송당초 악기연주실. 다음 달 14일 정기연주회를 위해 송당초 3∼6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송당목관앙상블이 합주 연습에 한창이었다. 악보와 지휘자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보며 플루트 연주에 집중한 3학년 유서진 양(9)과 강이을 양(9). 지난달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 온 ‘농촌 유학생’이다.

제주에 온 뒤로 서진·이을 양은 하루 생활이 달라졌다. 전교생이 1000명에 이르던 서울 학교에서 전교생 64명인 제주 학교로 유학을 왔다. 서울에선 오후 3, 4시쯤 교문을 나서 수학, 논술, 수영 등 학원 뺑뺑이로 이어졌던 하교 후 일상도 달라졌다. 제주에서는 학교 안에서 정규 수업과 방과후 수업으로 악기와 체육 등 예체능을 배우고, 교문을 나선 뒤에는 친구 집이나 학교 근처 오름으로 부모님과 함께 제주 곳곳에 소풍을 간다. 서진 양은 “제주에서는 학원을 안 다니니까, 다 같이 방과후 학교 수업을 듣고 친구 집에 가서 논다”며 “서울은 복잡한 도시인데 제주는 시골이라 너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 ‘학원에서 자연으로’ 달라진 가족 일과

자료: 서울시교육청
자료: 서울시교육청
이들이 참여한 프로그램은 서울시교육청이 2021년 1학기부터 시작한 농촌 유학 프로그램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1∼6학년,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농촌 유학은 서울 학생들이 도시를 떠나 6개월∼1년 동안 제2의 고향에서 새로운 친구와 이웃, 마을을 만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사업이다.

도심에서만 살던 아이들은 자연 친화적인 생태 교육을 체험할 수 있고, 인구 소멸 지역에서 폐교 위기에 놓인 학교는 학생 수가 늘어 학교와 인근 지역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장점이 있다. ‘4세 고시’ ‘7세 고시’ 등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사교육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자연환경에서 뛰어놀 기회가 된다는 입소문이 학부모 사이에서 퍼지며 2021년 228명으로 시작한 참여자는 2025년 819명으로 증가했다. 농촌 유학을 연장하는 인원도 2021년 2학기 기준 57명에서 올해 568명으로 크게 늘었다. 올해 2학기 기준 누적 참여 인원은 2670명에 이른다.

초등학교 1학년 쌍둥이 자녀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 이세나 씨(42)와 김근하 씨(45)는 2학기 제주 농촌 유학 프로그램을 신청해 부부가 모두 육아휴직을 내고 온 가족이 함께 제주로 이사를 왔다. 서울 출신 부부는 아이들이 어릴 때만큼은 시골에서 자라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제주 농촌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송당초 등굣길은 매일 아침 교장선생님이 나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들어간다. 1학년 학생이 7명뿐이라 담임 교사가 아이들과 1 대 1로 상호작용 하는 것도 장점이다. 오후 4시 10분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학교 근처 자연에서 뛰어놀 때가 많다. 이 씨는 “아이들이 집에 오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시절처럼 대문 없이 지낸다”며 “학원이 아니면 친구를 만날 수 없어 놀이터에서 놀 시간도 없이 학원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제주에서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뛰어논다”고 말했다.

가장 달라진 점은 언제 어디서나 자연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씨는 “서울에서는 곤충 판매하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사슴벌레를 얼마 전 집 베란다에서 발견했다. 자연이 항상 가까이 있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어제는 날씨가 좋아서 하교 직후 온 가족이 우도에 다녀왔다”며 “날씨가 좋을 때 언제든 가볍게 떠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제주 유학 연장을 고려 중이다.

● ‘섬진강 자전거, 정선아리랑’ 지역 특색 담은 교육

송당초를 비롯해 농촌 유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학교들은 지역 특색을 살린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교육 과정에 학부모의 만족도가 높아서다.

강원 정선군 화동초는 학생들이 지역 민요 정선아리랑을 배워 지역 예술가와 협업하며 상상력을 키우는 ‘나는 화암예술가’ 과정을 운영한다. 강원 양양군 현성초는 숲 체험과 목공 및 공예, 조개 잡기 체험을 하는 마을 연계 교육을 한다. 전남 구례군 광의초에는 지리산 등반 및 둘레길 걷기 등이 있다.

송당초는 제주에서만 배울 수 있는 수업과 체험학습을 학교 교육과정으로 두고 있다. 이경미 송당초 교장은 “제주에서만 배울 수 있는 신화 수업, 오름 탐방, 학생 인성 교육에 효과적인 목관악기 앙상블 등 다양한 특색 활동을 고민해 교육과정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올 3월 제주시 구좌읍 송당초등학교 3, 4학년 학생들이 학교 인근 당오름을 오르고 있다. 송당초는 학교 특색 과목인 ‘송당과 신화’를 운영한다. 송당초 학생들은 매년 제주 신화를 배우고 생태해설사와 함께 오름을 직접 오르며 자연환경을 탐방한다. 송당초 제공
올 3월 제주시 구좌읍 송당초등학교 3, 4학년 학생들이 학교 인근 당오름을 오르고 있다. 송당초는 학교 특색 과목인 ‘송당과 신화’를 운영한다. 송당초 학생들은 매년 제주 신화를 배우고 생태해설사와 함께 오름을 직접 오르며 자연환경을 탐방한다. 송당초 제공
송당초의 모든 학생은 제주 신화와 자연환경, 전통문화에 대한 수업인 ‘송당과 신화’를 배운다. 제주도를 만든 거대한 거인신 이야기인 설문대할망 이야기, 제주 무속 신화인 송당본향당신본풀이로 상상력을 키운다. 제주 지형, 바다, 농경·주거 문화도 수업 시간에 다룬다. 특히 송당초에서만 할 수 있는 체험학습은 송당리 일대 오름 체험이다. 당오름, 샘이오름, 아부오름 등 오름으로 둘러싸인 학교 입지를 반영해 아이들이 학교 근처 오름에 직접 올라 제주 생태환경을 체험한다.

2023년 전남 구례군 중동초로 농촌 유학을 떠나 지금까지 거주 중인 이윤희 씨(44)는 중동초 근처 지리산, 섬진강 등 주변 자연환경과 자연과 연계한 체험학습을 농촌 유학의 장점으로 꼽았다. 이 학교 5, 6학년 아이들은 지리산 천왕봉 등반을, 3, 4학년 아이들은 섬진강 길을 자전거를 타고 돈다. 이 씨는 “서울에서 계속 초등학교에 다녔다면 지리산 천왕봉 등반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아이들은 서울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기 때문에 시골에서 불편을 느끼고 작은 것에 오히려 감사하며 세상을 넓게 보게 됐다”고 말했다.

● 농촌 유학생 늘면서 폐교 위기 학교에 활기

농촌 유학 프로그램 운영 학교는 각 시도에서 학생 수가 적어 폐교 위기에 놓인 소규모 학교가 대상이다. 농촌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소멸 지역의 폐교 위기 학교에는 활기가 돌고, 지역에는 인구가 유입되는 것이 장점이다. 제주는 농촌 유학을 시작한 올해 2학기 42명이 모집됐다.

1953년 개교한 제주 송당초는 2013년 전교생 수가 39명까지 줄어 폐교 위기에 처했다.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해 학교 교육과정을 창의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올해 2학기 농촌 유학 시범학교가 되면서 이번 학기 서울에서 1학년 3명, 3학년 2명이 왔다.

마을도 힘을 보탰다. 송당초로 유학을 오는 학생 가족들이 저렴한 집세로 머물 수 있도록 ‘당오름빌’이라는 빌라를 마을 차원에서 지었다. 이런 노력으로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제 송당초 전교생 80%는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전학 온 학생들로 채워졌다.

송당초 이 교장은 “학생 수는 아이들이 사회성 발달에 중요한 요소인데 농촌 유학 시작 전에는 1학년 학생이 3명밖에 없었다”며 “농촌 유학으로 1학년 3명이 전입을 와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수도권 지역도 농촌 유학지에 추가된다. 서울시교육청이 이달 인천시교육청과 업무협약을 체결해 강화군, 옹진군 섬 지역에서 특색 있는 교육과 생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천시교육청과 지자체도 적극적이다. 지자체와 교육청이 예산을 절반씩 부담해 가족 단위로 이주하는 가정에 주거, 체류,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2028년 말까지 문화·여가·학습 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청소년 복합 문화 타운’도 조성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농촌 유학 활성화를 위해 앞으로도 농촌 유학 지역 확대를 꾸준히 해 나갈 예정”이라며 “농촌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복귀한 학생이 농촌 유학을 했던 지역과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농촌 유학 학생과 가족의 정착을 위해 학교와 거주지 정보 제공 창구가 통일되고, 지역에 대한 정보의 질이 보완돼야 하는 점은 과제로 지적된다. 학부모 이 씨는 “농촌 유학 관련 문의 사항을 언제든 간편하게 묻고 답을 얻을 수 있는 일원화된 창구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농촌 유학 학교의 운영 프로그램은 일반 학교보다 다양해 전담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며 “개선 방안을 고민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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