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면티’는 미국 유학생 중심의 재미 한인과 연대한 증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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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흔적 찾기〈3〉
1981년 워싱턴 한국대사관 앞에서
10달러 내고 면티 구입해 시위 지원
해외 동포들도 5·18 홍보 힘 보태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왼쪽)이 지난달 27일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을 만나 광주가 적힌 면티를 기증하고 있다. 독자 제공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왼쪽)이 지난달 27일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을 만나 광주가 적힌 면티를 기증하고 있다. 독자 제공
3일 부산 동구 중앙동의 한 빌딩 4층. 퇴직 교사인 박유순 씨(64·여)와 박용안 씨(63·한국무역학회 부회장)는 부산지역 대학생 노래패 ‘반올림’ 회원들과 마주 앉았다. 이날 만남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를 토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1979년 10월 전남대 철학과 4학년이던 유순 씨는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며 대학 학생상담지도관실에 불을 질러 구속됐다. 용안 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5월 진실을 전한 소식지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시민군 지도부 구성과 최후 항쟁을 주도했던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했다. 그는 계엄군의 만행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시민군이었다.

유순 씨는 대학생들에게 5·18 직전까지 정치경제적 상황과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한 대학생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우원 씨의 사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유순 씨는 “개인적으로는 우원 씨의 사죄를 받아드린다”고 했다.

용안 씨는 민주와 인권의 가치를 알린 5·18의 시대정신을 설명했다. 대학생들은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하나로 몽쳐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 계엄군이 물러간 뒤 광주 시민들이 자유스럽고 평화롭게 생활했던 ‘대동 세상’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

한 학생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과 진압에 맞서 어떻게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항쟁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용안 씨는 “시민들이 공포를 느꼈지만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공포를 이겨내고 광주를 지키려 했다”고 답했다.

“계엄군이 발포했을 때 심정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용안 씨는 “총소리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숨는 게 사람의 심리지만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계엄군에 맞섰던 고 윤상원 열사 등은 역사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을 희생했다”고 말했다. 용안 씨는 5·18이 남긴 유산에 대해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와 자주권을 갖는 것이 장기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63)은 지난달 27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5·18 당시 미국에서 5월 진실 규명을 외치던 유학생들이 입었던 면티를 기증했다. 면티는 당시 유학생이었던 김환희 씨(75·여)가 입었던 옷으로, 흰색 바탕에 ‘광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 씨는 1981년 이 면티를 입고 워싱턴DC 주미 한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광주항쟁 지지 시위에 참여했다. 면티는 시위를 위한 성금 모금을 위한 것이었고, 참여자들은 10달러 미만의 성금을 냈다.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은 “‘광주 면티’는 5·18 소식이 외신기자들을 통해 세계 각국에 전달되면서 미국 유학생 중심의 재미 한인과 연대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전남 나주 출신인 이 회장은 5·18 당시 전남대 휴학생이었다. 시민군과 함께 활동하다 27일 오전 4시경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계엄군에 붙잡혔다. 이후 강원도 군부대로 끌려가 한 달 동안 모진 훈련을 받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그가 5·18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외신 사진은 5년 전 세상에 알려졌다.

이 회장은 1985년부터 나주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998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는 “5월만 되면 5·18 당시 상황이 떠올라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이민을 갔다”고 말했다. 그는 캐나다의 한 주립대에서 행정직원으로 일하다 퇴직해 현재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 있다.

이 회장은 2018년 미국, 캐나다에서 5·18을 기리는 기념식 등을 갖는 사람들을 모아 미주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를 결성했다. 그는 “5·18이 세계 민주주의 표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외에서도 동포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고 말했다.

원순석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그동안 5·18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해외 동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5·18의 세계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 흔적 찾기#5·18 광주 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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