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휴지공장 끝내 폐업… 삶도 휴지처럼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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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할퀸 삶] <1> 무너지는 富의 사다리
재택근무로 화장지 수요 줄어 폐업
음식점 종업원은 졸지에 실업자로… 자영업-서비스업 종사자 최악 타격
집값-주가는 급등, 자산 격차 심화
운영하던 휴지공장 문 닫고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21년간 휴지공장을 운영하던 김복형 씨는 8월 코로나19 여파로 사업을 접고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23일 일을 마친 김 씨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 현장을 떠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일자리를 구할 때까진 이 방법밖엔 없어요.”

미국 뉴욕시 퀸스에 사는 40대 남성 호세 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근처 교회의 무료급식소(푸드뱅크)에 들른다. 올 때마다 100m가 넘는 긴 줄에 서서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데도 이런 수고쯤은 당연하게 여긴다. 호세 씨는 “아내와 두 자녀가 있는데 일자리를 잃었으니 이곳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며 “내가 누군지, 자격은 되는지 따지지 않고 음식을 나눠주는 게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호세 씨의 삶이 원래 이랬던 건 아니다. 그는 뉴욕 시내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평범한 근로자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고 3월 도시에 봉쇄령이 떨어지자 곧장 해고 통지를 받았다. 반년 넘게 새 일자리를 찾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삶이 통째로 바뀐 호세들은 세계 곳곳에 있다. 21년간 휴지 공장을 경영했던 김복형 씨(66)는 8월 사업을 접었다. 휴지를 납품받던 사무실이 재택근무에 들어가면서 휴지 같은 비품 소비부터 줄였다. ‘김 사장’으로 불리던 그는 지금은 서울 종로구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김 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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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남녀노소, 국적을 따지지 않고 공격했지만 바이러스가 남긴 상처는 차별적이었다. 고소득 화이트칼라 근로자는 타격이 덜한 반면에 서비스 업종이나 자영업자, 일용직에는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통계로도 드러난다. 한국 가계의 근로소득은 3분기(7∼9월) 기준으로 역대 최대 폭으로 감소한 가운데 특히 하위 1, 2분위 근로소득이 각각 전년 동기 대비 10.7%, 8.4% 줄었다. 하지만 제일 상단의 5분위는 0.6% 감소하는 데 그쳤다. 이런 가운데 집값과 주가는 연일 고점을 갈아 치우고 있다. 돈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일찍 찾아온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위기로 소득과 자산 격차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의 삶이 크게 바뀔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본의 경제연구소인 다이와소켄은 6월 ‘코로나 쇼크가 가져오는 격차확대’ 보고서에서 “코로나 쇼크는 경제활동을 위축시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지만 자산가에게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집값 오르고 주가 급속 회복… 이전 위기와는 다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가져온 경제적 위기가 부동산 시장, 증시에 미친 영향은 과거 위기 패턴과 달랐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전국의 집값은 떨어졌다가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는 데 4년 2개월이 걸린 반면에 이번 위기에선 줄곧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증시도 단기 충격에 그치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회복 속도가 8개월 더 빠르다.

23일 KB국민은행 ‘월간 주택가격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전국 주택 매매가격지수는 104.6이었다. 이는 국내에서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올 2월을 100으로 봤을 때보다 4.6% 높은 수준이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이 지수는 위기가 촉발된 지 8개월이 지난 시점에 각각 11.8%, 1.7% 하락했다. 특히 기업들의 부도가 잇따랐던 외환위기 때는 4년 2개월이 지난 뒤에야 집값이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주식시장도 과거 위기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코스피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 12개월 정도 걸렸지만 이번 위기 때는 약 4개월로 회복에 걸리는 기간이 짧아졌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22개월이 걸렸다. 직장인 박모 씨(38)는 “경제가 안 좋다는 말들이 계속 나와 투자를 망설이는 사이 집값과 주가가 겁날 정도로 오르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실물 지표들이 더디게 회복되는데도 집값이 오르고 증시가 빠르게 회복된 건 유례없는 저금리로 돈이 넘쳐나고 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올 9월 통화량(M2·광의통화)은 3115조8000억 원으로 1년 전에 비해 9.2% 증가했다. 2016년 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4∼8%대의 증가율을 보였던 통화량은 올 2월부터 매달 200조 원 넘는 규모로 불어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금리를 낮추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부동산, 주식 등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집값이 평균 10% 떨어졌지만 올 2분기(4∼6월) 고소득 국가에선 집값이 오히려 5% 상승했다”고 전하며 그 원인으로 저금리를 꼽았다.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올해 정책 금리를 평균적으로 2%포인트 낮추면서 대출에 따른 이자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3, 5월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낮췄다. 현재 기준금리는 연 0.50%로 사상 최저다.

근본적으로 이번 위기의 출발점이 과거 위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는 경제와 금융 시스템 내부의 누적된 문제가 터지면서 불거졌다. 하지만 코로나19는 공중보건 위기로 봉쇄 등 물리적 거리 두기가 실물 경제로 전이되면서 나타났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위기는 과거처럼 경제 기초체력이 약화돼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잡히고 빠르게 소비가 회복되기 시작하면 정상 궤도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장윤정 기자 yunjng@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코로나#경제타격#경제력 격차#무너지는 부의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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