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살았지만 이런 비 처음…심장 쿵쿵 복구는 막막”

  • 뉴스1
  • 입력 2020년 8월 6일 10시 33분


엿새째 철원지역에 최대 700㎜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6일 오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한 주민이 한탄천 범람으로 피해가 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망연자실하고 있다. 한탄천 범람은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인근 마을들이 물에 잠기며 주민 780명이 긴급 대피한 상황이다.2020.8.6/뉴스1 © News1
엿새째 철원지역에 최대 700㎜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6일 오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한 주민이 한탄천 범람으로 피해가 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망연자실하고 있다. 한탄천 범람은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인근 마을들이 물에 잠기며 주민 780명이 긴급 대피한 상황이다.2020.8.6/뉴스1 © News1
“정확히 120㎝, 제 키가 160㎝쯤 되니까 허리 위까지 잠긴 셈인데…큰일날 뻔했죠. 일단 몸은 건강하게 간수했으니까 다행인데 이제부터 치우고 집기 챙기려면….”

철원 동송읍 생창리에 사는 30대 이모씨는 집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아직 집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거실에 놓아뒀던 냉장고는 넘어졌고, 이에 밀린 상자와 의자들이 문을 박살내고 현관까지 나와 있는 상태다.

옷방에는 허벅지까지 물이 들어찼었다. 조립형 옷장에 걸어뒀던 옷가지들은 모두 젖은데다 흙도 덕지덕지 묻은 상태다. 부엌의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도 사실상 못쓰게 됐다. 이씨는 “빗물에 떠내려온 쓰레기까지 뒷마당에 쌓여있어서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 엄두가 안난다”며 울상을 지었다.

지난 1일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철원 지역 강수량은 이들이 대피하기 전후인 5일 오후 1시까지 605.5㎜(철원 동송읍 장흥리)를 넘었고, 5일 오후 1시10분 기상청 ‘제08-100호 기상속보’에 따르면 1시간 강수량은 33.5㎜(철원읍 외촌리)에 달했다. 그야말로 폭우가 쏟아진 셈이다.

철원에는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기상청이 이날 오후 1시10분 밝힌 지난 1일 오후 6시부터의 누적 강수량은 강원 철원 장흥에 692.5㎜ 가량이다.

“1996년에도 홍수가 나서 마을 전체를 덮쳤지요. 이번에는 한 사흘 전부터 둑 위로 물이 넘실거리다가 한번에 확…비상약 봉지랑 지갑만 챙겨서 얼른 나왔는데 냉장고, 세탁기, TV 다 버리게 생겼네요.”

오덕리 오덕초등학교 대피소에서 만난 박영치씨(81)도 이번 물난리 상황을 회상했다. 평생 철원 일원에서 산 그는 이번 비처럼 순식간에 물이 덮친 게 처음이라고 말했다.

“다 두고 나왔다”는 그는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데, 일단 얼른 다시 돌아가면 좋겠다. 허리 넘게 물이 찼다는데, 어제 뛰쳐 나올때보다는 지금 비가 덜오니까 언제 되돌아 갈 수 있을지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이었다. 또 그는 “비 때문에 우산이 휘청이는데 살기 위해 뛰쳐나온 셈”이라고도 덧붙였다.

대피를 포기하고 집에서 상황 완화를 기다리던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이을송씨(86)는 대피 대신 침대 위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여태까지 60년 동안 물이 넘치도록 차는 걸 못 본 도랑이 넘치면서 어디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이씨는 말했다.

특히 넘어져서 다리가 성하지 못해 미끄러져서 다치면 죽을 것 같았다고도 말을 이었다. ‘가족에게 연락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아들이 준공무원인데, 그쪽에서도 수해지원을 가야 해서 도움 받지 못했다”면서 말을 줄였다.

마당에서 기르던 반려동물 등을 잃은 집도 있다. 한참 동안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붙잡고 지원을 호소하던 김인예씨(76)는 “개 1마리와 닭 8마리가 죽었다. 줄이 풀려서 떠내려가 죽은 듯하다”면서 슬퍼했다. 다행히 주민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한 진돗개 1마리는 오덕초등학교 운동장 옆에서 기운 빠진 모습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수해복구가 한창이었다. 농기구까지 동원되기 시작했다. 철원소방서에서 물을 공급하면 이를 제초제를 뿌리는 농기계에 옮겨 담고 흙탕물을 씻어내는 것이다. 물이 다시 가득 찼지만 조금씩 씻겨가는 흙을 보면서 자원봉사자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수해복구 현장을 비롯해 주민들이 대피해 있는 대피소에는 자원봉사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언론이나 일반의 관심만큼 봉사 인력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군사접경지인 만큼 국군 장병들의 손길이 더해져서 조금씩 일상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분주한 모습이다.

칠순을 넘긴 안승열씨(72)는 6일 오전 일찍 수재민들이 모여 있는 강원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 오덕초등학교 체육관에 나와서 식사 봉사를 했다. 음식을 나눠서 체육관 내의 재난구호셸터에 음식을 나눠줬다. 거동이 불편한 구순 노인 등이 고맙다는 말을 연신 했다.

금학봉사회 소속인 안씨는 자신의 포도밭이 일부 물에 잠긴 상태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이라도 나서서 봉사해야 한다”면서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그는 “평소에도 오전 4시에 어르신 도시락 배달 봉사를 했는데, 이 정도는 별것 아니다”면서 봉사 정신을 내보였다.

같은 봉사회 진승엽씨(53)는 경기 포천에서 도계(道界)를 넘어왔다. 그는 철원에서 10년간 살다가 개인 사정으로 1년 전 이주했다. 고향의 안타까운 상황을 전해들은 그는 “오전 6시부터 와서 일하고 있다. 내일도 시간되면 와서 도울 것”이라며 짐을 나르고 배식하는 등 봉사를 이어갔다.

인근 군부대 장병들도 나서 험한 일을 도맡았다. ‘백골부대’로 불리는 제3보병사단에서는 다목적 산불진화 방제차량과 함께 40여명의 장병들이 주민 일손을 도왔다. 전투복과 전투화는 온통 진흙이 묻어 만신창이가 됐지만 쉬지 않고 수해 가정에서 쓸 수 없게 된 집기나 물에 떠밀려 내려온 쓰레기 등을 포대에 넣는 작업을 했다. A 상병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나 현장을 인솔하던 한 군 간부는 “상급부대 지휘 없이 인터뷰는 할 수 없는 점 양해 바란다”고 말을 줄였다.

피해가 많았던 동송읍의 공무원들도 비상근무로 전부 현장으로 나왔다. 침수 정도에 따라 구호물품 배분이나 지원 등이 이뤄지기 때문에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신원을 확인했다. 한 읍사무소 직원은 “어르신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각 가구 상황을 지켜보느라 조사하기 쉽지 않다”면서 “빠른 지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정순 철원군보건소 팀장도 생창리노인정에 간이 진료소를 차렸다. 혹시 모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우려에 대처하기 위해 마스크도 나눠주고 손 소독도 독려하는 중이다. 노인정에 들어서는 어르신마다 “무릎을 소독해달라” “배탈이 났으니 소화제나 약을 달라”는 등 요구를 하나씩 해결하기도 했다.

자원봉사와 군병력 지원은 주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예보상 경기도에 7일까지 120㎜ 비가 전망됐고, 14일께까지 장마전선(정체전선)에 의한 강수가 계속될 것으로 기상청 중기예보에 발표된 상황이라 향후 지원 여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앞서 이날(6일) 오전 9시50분께 수해지역 현장을 둘러본 최 강원지사는 주민들에게 “(이현종 철원)군수와 함께 최대한 빨리 수습하겠다”고 현장에서 밝힌 바 있다.

(철원=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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