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인이 흉기 들고 아내 폭행… “소문나면 창피” 피해자 신고 꺼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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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층 배우자 학대 5년새 2.7배로
“다 늙어 뭐가 달라진다고…” 쉬쉬… 피해자 본인 신고는 7% 그쳐
학대 방치하다 생명위기 몰리기도… “알려야 나아진다는 확신 가져야”

“수십 년간 이러고 살았는데 다 늙어서 뭘…. 처벌한다고 달라지는 게 뭐 있겠어요?”

지난달 18일 오전 10시경 경기 수원시 장안구 주택가의 한 가정집. 수십 년간 남편(78)의 폭력을 견뎌온 A 씨(81)는 수화기 너머의 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루 전인 17일 아침에도 남편에게 폭행을 당한 A 씨는 “남편이 또 나를 때린다”며 112에 신고를 했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으로 출동했으나 A 씨는 “홧김에 신고했다. 남편에 대한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며 경찰을 돌려보냈다.

A 씨가 걱정됐던 경찰관은 18일 전화를 걸어 노인보호전문기관 상담을 권했다. 하지만 A 씨는 “생각해보고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만 하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경찰은 19일과 21일, 25일 등 세 차례 더 전화로 설득한 끝에야 A 씨를 경기도에 있는 한 노인보호 시설로 보낼 수 있었다.

65세 이상 노인이 배우자로부터 폭행 등의 학대를 당하는 일이 해마다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15일 발표한 ‘2019년 노인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652건이던 배우자에 의한 학대가 매년 증가해 지난해엔 1749건이었다. 5년 새 약 2.7배로 많아진 것이다. 전체 노인 학대 가해자 중 배우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2015년 15.4%에서 매년 늘어 지난해엔 30.3%였다.

6일 오후 2시 40분경 인천 부평경찰서 청천지구대에 주민 신고가 접수됐다. 부평구의 한 빌라에서 부부싸움이 났는데 할아버지는 흉기를 들고 있고 할머니는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하자 주민 10여 명이 빌라 1층의 부부싸움이 벌어진 집을 가리켰다.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팔을 다친 80대 아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편을 피해 창문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경찰관 2명이 도착했을 때 양손에 흉기를 들고 있던 남편은 특수상해 등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아내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뒤 경찰이 마련한 임시 거처에서 며칠간 지내야 했다. 경찰 조사 결과 남편이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올 1월 12일 오후 11시경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흉기를 휘두르며 쫓는 남편을 피해 옥상까지 달아난 여성 노인이 경찰에 구조되는 일도 있었다.

배우자로부터 폭행 등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 대부분은 신고를 꺼린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배우자에 의한 학대 1749건 중 피해자가 직접 신고를 한 경우는 127건(7.3%)에 그쳤다. 피해자들이 직접 신고하는 비율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배우자에 의한 학대 피해자 중 상당수는 집안 일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참고 견디는 분들이 많다”며 “어쩌다 신고가 들어와 출동해 보면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경기도의 한 노인보호 시설에서 학대 피해 노인들을 상담하는 A 씨는 “배우자의 상습적 폭력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피해자들은 신고를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신고하면 달라진다’는 생각을 갖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성희 기자 chef@donga.com
#노인층#배우자 학대#남편#아내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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