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상근]우리가 M을 홍콩으로 내쫓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스타트렉’ 커크 함장의 리더십 “위기 대면이 우리 운명” 일깨워
미래의 커크 함장 될 청년들 열정페이 시달리다 한국 떠나
‘봉건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을’ 국정 농단에 요동치는 나라… 분노 포기한 청년이 더 걱정이다

김상근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김상근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동료 교수가 ‘스타트렉 파티’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이 즐겨 찾는 주말 파티의 이름이 ‘스타트렉’이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스타트렉은 1966∼1969년 미 NBC를 통해 79회나 방영된 최고의 인기 드라마(요즘은 이를 ‘미드’라 한다)였다. 예일대 교수와 학생들은 주말이면 한 곳에 모여 40여 년 전 방영된 스타트렉을 다시 시청하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참가자는 반드시 스타트렉 등장인물처럼 분장을 해야 입장이 가능하단다. 자기가 가져온 맥주를 마실 수 있지만 일반적인 파티라기보다 스타트렉 주인공인 제임스 커크 함장의 리더십에 대한 분석과 토론이 단골 주제였다고 한다.

 우주함대 USS 엔터프라이즈호의 커크 함장은 대원들을 이끌며 수많은 위기와 도전에 직면한다. 그때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뿐 아니라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리더십의 명문장을 쏟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모든 대원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커크 함장은 “위기와 대면하는 것은 우리들의 업무다. 그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다. 우리가 엔터프라이즈호에 승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며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곤 했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리더십 세미나’ 개설을 의뢰받았을 때 떠오른 생각이 스타트렉 파티였다. 그래서 필자는 5년 전 학부 졸업반 학생들을 위한 ‘스타트렉 리더십’ 세미나를 개설했다. 토론 수업으로 기획했기에 30명으로 수강 인원을 제한했고 수강생의 반 정도가 졸업을 앞둔 경영학과 학생들이었다.

 14주로 구성된 가을학기 동안 수업 전에 스타트렉을 보고 와서 3시간 동안 커크 함장의 리더십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세미나 시간에 발제를 맡은 학생은 스타트렉 주인공의 복장을 하도록 했다. 토론으로만 진행되는 수업은 활기로 가득했고 학기가 진행되면서 교실에서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와 함께 미래의 리더로 성장해갈 학생들의 포부도 커져만 갔다. 그 학생들 중 미래의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커크 함장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학기가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학생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애써 제출한 입사원서들이 가을 낙엽처럼 차가운 취업의 거리에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학기가 끝난 12월 중순까지 30명 중에서 2명만이 취직에 성공했다. 나머지 28명은 조용히 졸업장을 받고 학교를 떠났거나 휴학을 신청하며 마지막 젊음의 바리케이드를 쳤다.

 M이란 학생은 그 스타트렉 수업에 참여한 경영학과 여학생이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상위 1% 안에 드는 명민한 학생이었는데, 졸업 후 ‘열정 페이’에 내몰리며 크고 작은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래도 선생이라고 내게 면담 신청을 해서 만났더니, 얼굴에 작은 흉터가 나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인턴을 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대상포진에 걸렸다는 것이다. M이 인턴으로 일하면서 받았던 대우는 노동착취 수준이었다.

 학교 부근 식당으로 데려가 불고기를 구워주며 위로해보려 했지만 식탁을 마주하고 있던 M이 내뱉은 말에 고기를 집던 내 젓가락질이 얼어붙고 말았다. “교수님, 스타트렉은 그냥 상상의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아 홍콩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봉건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을’ 엄청난 사건 때문에 세상이 요동치고 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국정 농단이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런 일에 분노하지 않는다. ‘민중은 개돼지’라 불러도, ‘능력 없는 너희 부모를 욕하라’는 신분의 저주가 난무해도 젊은이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이미 포기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인터넷 화면에 죽창을 그려 넣고 ‘죽음만이 평등을 가져온다’며 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젊은이들보다 나는 홍콩으로 떠나버린 M과 같은 젊은이들이 더 걱정이다. 장차 커크 함장의 역할을 맡아야 할 M과 같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정정한다. M이 떠난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봉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M을 홍콩으로 내쫓았다.

김상근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스타트렉#연세대#리더십 세미나#입사원서#열정 페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