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선/이기수]사립대학의 법률 비용 지출, 국제화 시대엔 허용해야

  • 동아일보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A사립대학은 영국의 명문 대학과 학점교류협약을 체결하려고 한다. 계약 체결에 앞서 법률적 위험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법률자문을 했다.

B사립대학은 국내 한 이동통신사와 원격의료시스템을 개발하던 중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이미 상당한 비용을 투입해 손해가 예상되는 만큼 법무법인을 찾았다.

놀랍게도 이 대학들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현행 사립학교법 제29조 제6항에 의하면 교비회계에 속하는 수입이나 재산은 다른 회계에 전출할 수 없다. 또 교비회계의 세입·세출 항목을 정하고 있는 사립학교법 시행령 제13조는 자문비 또는 소송비를 세출의 항목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교비회계에서 자문비 또는 소송비를 지출하면 검찰은 다른 회계에 전출한 것으로 여기고 우선 기소를 하고 보는 경우가 많다. 법을 준수하기 위해 변호사에게 자문했다가 오히려 처벌받을 위험을 지는 것이다.

판례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언제 어떠한 요건하에서 법률비용을 지출할 수 있는지 법률 전문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러다 보니 각 대학은 법률비용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대외적으로 밝히기를 꺼린다. 법률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지만 법률비용을 쓴 사실을 밝혔다간 언제 처벌의 대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는 시행령 제13조 중 세출 항목이 35년 동안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세기 동안 대학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빠르게 변했다. 더구나 지금 전국의 대학은 입학생 감소에 따라 구조개혁의 태풍 앞에 서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법률 수요가 점차 증가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규정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라는 것은 50년 전에 맞춘 옷을 입고 경기장을 달리라는 것과 같다.

다행히 지난달 3일 교육부가 회계운영의 합리성 확보를 위하여 소송경비를 학교 운영상 필요경비로 세입·세출 항목에 명시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법률비용 지출의 요건과 기준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시행령 개정 뒤에도 개인이 법률 문제에 교비를 사용하는 행위는 업무상 횡령죄와 배임죄 규정에 따라 처벌이 가능하다.

우리는 대학교육의 선진화, 국제화를 부르짖으며 막대한 국가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법률비용 지출에 대한 근거나 기준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법률 전문가의 조력 없이 선진화된 교육행정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법률 자문을 필수적인 사전 절차로 생각하는 다른 세계 유수의 대학들과 경쟁하는 것도 힘들다.

지금이라도 관련 법령이 개정되지 않으면 각급 사립대의 총장은 물론이고 총무, 법무, 예산, 회계 실무를 담당하는 교직원들까지 범죄자가 될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까지 대학의 선량한 직원들을 잠재적인 범법자로 만들 것인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사립대학#법률비용#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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