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서울 종로구 무악동(옛 서대문구 현저동) ‘옥바라지 골목’의 모습. 골목 맞은편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수감자의 가족이 옥바라지를 위해 이곳을 찾으면서 여관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앞뒤를 칼 찬 순사가 지키는 한 무리의 전중이(죄수)들이 가까이 오는 게 보였다. 불그죽죽한 옷을 입고 발에 쇠사슬까지 차고 있었다. 우리는 두려운 얼굴이 되어서 발로 세 번 땅을 탕탕탕 구르고 침을 퉤 뱉었다.’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한 대목. 개성에서 살던 그가 엄마 손에 이끌려 1938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현 무악동)으로 이사 왔을 때 서대문형무소로 향하는 죄수들을 본 이야기다. 그가 살던 집은 재개발로 없어졌지만 동네의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서울 종로구 무악동 제2재개발구역이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맞은편의 오래된 주택가인 이곳은 ‘옥바라지 골목’으로도 불린다. 1907년 현저동 101번지에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가 들어선 후 생긴 이름이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독립운동가가 대거 투옥됐고 이들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가족들이 몰려들면서 여관촌이 형성됐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여관 청소를 도우며 옥바라지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했다. 1955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는 한덕 씨(67)도 “먼 곳에서 옥바라지하러 온 사람들이 여관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면 동네 사람들이 빈방을 내주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 주택가는 곧 철거되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112가구 중 70% 이상이 조합 설립에 동의해 지난해 7월 종로구청이 관리처분인가를 내렸다. 26일 석면 철거도 완료된 상태. 재개발을 반대하는 사람 중 18가구만이 현재 무악동에 남아 있다.
철거 결정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김용하 씨(61)는 “마을에 1930, 40년대에 지은 한옥을 고쳐 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이런 곳을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로 살리고 역사교육관을 만들면 좋을 텐데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인 서대문형무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했다.
한 씨도 “종로구에서 이곳을 관광코스로 만들었는데 얼마 못 가 재개발을 한다니 참 안타깝다”며 “지붕만 새로 얹은 옛날식 초가집을 지금도 볼 수 있는 곳이다”고 말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설계학과 교수는 “옥바라지 골목을 꾸려 간 사람들이 주민이나 죄수의 가족이어서 역사적 기록이 없다. 그래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이후 평범한 일상사도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만큼 옥바라지 골목에 대한 가치를 재평가해 역사문화보호구역으로 지정하거나 최소한 한옥집이라도 이전해 보존하는 등의 대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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