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로스쿨 年23명씩 ‘2세 법조인’ 배출… 사법시험의 2.5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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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試-로스쿨이 배출한 ‘법조 가족’ 분석해보니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

대한민국에서 ‘세습(世襲)’이란 단어는 북한 권력층 또는 재벌가 등 극히 제한적인 분야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법조계에서도 심심찮게 이 단어가 사용된다. 1963년 시작된 사법시험은 4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 신분 상승, 인생 역전의 상징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고를 간신히 졸업한 검찰 말단 여직원을 변호사(정영미·2008년 본보 인터뷰)로, 신림동 식당에서 일하며 시험을 준비하던 고학생을 변호사단체 수장(김한규 서울변호사회장)으로 만들어준 ‘희망의 사다리’이기도 했다.

2017년 폐지되는 사법시험 대신 유일한 법조인 양성제도가 될 ‘로스쿨-변호사시험’ 제도는 시작 때부터 ‘세습’ 논란이 일었다. ‘돈스쿨’ ‘현대판 음서제’ 등의 오명이 따라다닌다. 동아일보는 최근 7년간 사법시험 출신과 변호사시험 3회까지 응시한 로스쿨 출신 법조인들을 전수 조사해 사법시험과 로스쿨 양 제도 아래에서 달라진 법조계 ‘세습’ 경향을 분석했다.

2009년부터 올해까지(사법연수원 38∼44기) 7년간 배출된 사법시험 합격자 6000여 명 중 부모가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 교수인 법조인 자녀는 총 69명이었다. 로스쿨 1∼3기 3년간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4500여 명 중 법조인 자녀는 이보다 많은 71명이었다. 한 해 평균 사법시험은 9명, 로스쿨은 23명의 법조인 자녀를 배출한 것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법조 가족의 탄생이 이전보다 2.5배로 늘었다.

사법시험 합격 땐 ‘가문의 영광’

사법시험에 합격한 자녀는 법조인 부모의 자랑이었다. 해마다 사법연수원의 보도자료에는 아예 ‘법조인 가족 수료 현황’란이 따로 구분돼 부모 이름과 현직 그리고 자녀 이름이 공개됐다. 사법연수생 시절 아버지가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 딸은 수료식에서 ‘부전여전’이란 말과 함께 큰 박수를 받았다. 그만큼 사법시험은 부모의 ‘후광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시험이었고, 자녀의 급제와 입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본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38∼44기 중에는 차한성 전 대법관 아들 차호동 검사, 검사 출신인 정홍원 전 국무총리의 아들 정우준 검사, 이상훈 대법관 아들 이화송 판사(이상 연수원 38기), 양창수 전 대법관 아들 양승우 판사, 우창록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 아들 우재형 변호사, 조병현 전 서울고등법원장 아들 조재헌 판사(39기), 이성호 서울중앙지법원장 딸 이예림 판사, 김연태 전 사법연수원장 아들 김상균 변호사(40기), 신영철 전 대법관 아들 신동일 씨(41기), 강신욱 전 대법관 아들 강석원 변호사, 노환균 전 법무연수원장 아들 노용준 씨(42기), 이인복 대법관 아들 이한원 씨,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 딸 박지원 씨(44기) 등이 대를 이은 유력 법조인 자제로 ‘공시(公示)’됐다.

두 자녀 이상 사법시험에 합격한 법조인 집안도 있었다. 송진현 전 서울행정법원장은 딸 송민하 검사(40기)와 아들 인원 씨(44기)를, 민형기 전 헌법재판관은 장남 민경서 변호사(41기)와 차남 민경현 변호사(42기)를 연속 합격시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조대현 전 헌법재판관과 그의 쌍둥이 아들 영욱(36기), 영종 씨(37기)도 ‘한 지붕 세 법조인’ 집안이다.

2001∼2002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제43, 4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명단. 매년 세밑 추위가 시작될 즈음 이 같은 명단과 수석 또는 이색 합격자 사연이 신문에 실렸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수험생의 사연은 동경과 희망의 대상이었다. 사시 합격자가 1000명으로 늘고 인터넷 보급이 늘면서 합격자 명단은 신문 지면 대신 웹에서 확인하게 됐다. 동아일보DB
2001∼2002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제43, 4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명단. 매년 세밑 추위가 시작될 즈음 이 같은 명단과 수석 또는 이색 합격자 사연이 신문에 실렸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수험생의 사연은 동경과 희망의 대상이었다. 사시 합격자가 1000명으로 늘고 인터넷 보급이 늘면서 합격자 명단은 신문 지면 대신 웹에서 확인하게 됐다. 동아일보DB
변호사시험은 합격해도 ‘쉬쉬’

로스쿨 체제에서 유력 법조인 자제들이 부모의 후광을 입고 대형 로펌에 입사했다거나 대놓고 고위 법관 자제들만 뽑는다는 일부 로펌 등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대 로스쿨에 추가 합격했다가 대형 로펌을 거쳐 최근 검사로 임용된 안상수 창원시장의 아들 A 씨는 로스쿨 입학과 로펌 입사, 검사 임용 내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두 자녀 중 한 명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다른 한 명은 로스쿨 출신일 경우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한 고위 법관의 경우 사법시험에 합격한 장남은 별 얘기가 없었지만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입사한 차남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억울해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로펌이나 단체에서 터를 닦는 ‘2세 변호사’도 부쩍 늘었다. 로스쿨 출신 법조인 자녀 71명 중 14명(20%)이 아버지가 대표나 파트너 등인 회사에 취업했다. 대기업과 대형 로펌, 공공기관(검사 포함)에 취업한 2세들은 71명 중 33명이었다.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로스쿨에 입학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고려대 경희대 동아대 부산대 제주대 로스쿨 등에선 해당 학교 로스쿨 교수의 자녀를 놓고 재학생들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가 많다. 대표적인 ‘로스쿨 옹호론자’인 지방 한 국립대 로스쿨 교수의 딸도 유명 사립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이들 중엔 오히려 법조인 아버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2세들도 있다. 현직 로스쿨 교수의 아들로 최근 김앤장에 입사한 정모 변호사는 연세대 로스쿨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기업 사내변호사로 입사한 이모 전 서울고검장 아들은 서강대 로스쿨을 차석으로 졸업했다. 전직 검사의 딸인 로스쿨 출신 변호사 이모 씨(28)는 “로스쿨을 나온 것이 ‘죄’도 아닌데 부모 직업을 문제 삼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변호사시험 성적 비공개에 사시 존치론 재부상


로스쿨 제도는 법률서비스의 가격과 문턱을 낮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 물론 ‘전관예우’ 관행은 여전하지만 변호사 수가 늘면서 과거와 같은 콧대 높은 행태로는 살아남기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사법시험 ‘한 방’으로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행세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가진 법조인이 배출되는 데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쿨 제도가 불공정하다는 지적을 받는 것은 변호사시험 성적, 합격자 명단, 법원 검찰 로펌 채용 과정이 모두 ‘비공개’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합격자 서열화로 인해 로스쿨 교육이 시험 위주의 교육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게 주된 이유다.

변호사의 능력을 측정할 객관적 지표가 없다는 점은 학벌과 집안 배경, 인맥 등 ‘집안’ ‘배경’ 같은 불공정한 요소가 판검사 임용과 로펌 채용에 작용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무부를 상대로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 공개 소송을 내 1심에서 승소한 김한규 서울변호사회장은 “합격자 명단과 성적 비공개가 로스쿨 제도의 공정성에 대해 불신을 가중시킨다”고 지적했다.

면접 인성평가 등 선발 기준이 주관적인 로스쿨 선발 과정도 문제다. 몇몇 로스쿨 교수는 입학 전부터 졸업 후 취업을 고려해 학생을 분류한다. 로스쿨 면접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인사는 “교수들끼리 ‘대형 로펌에서 유력가 자제들을 뽑는 게 뭐가 문제냐. 사건 수임 능력도 경쟁력’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고 귀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한 유명 사립대 로스쿨 교수는 “지금도 부모의 지원이 없으면 로스쿨에 오기 힘든데 앞으로 더 심해져서 유력가 자제가 아니면 로스쿨에 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로스쿨 제도의 불투명성은 사법시험 존치론의 주된 근거다. 사법시험 존치는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변호사회 신임 집행부의 공통된 공약으로, 지난 한 해에만 4개의 관련 법안이 발의돼 국회에 계류 중이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로스쿨#세습#사법시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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