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오른손은 절대 모르게, 왼손으로 퍼주는 사랑

입력 2014-05-08 03:00업데이트 2014-05-08 07:54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영길 씨는 9번의 패럴림픽 현장을 누비며 사진을 통한 봉사를 실천해온 장애인체육의 산증인이다. 또 경북 포항에서 사랑의 밥차를 운영하고 있다. 김 씨가 사랑의 밥차 안에서 한 손엔 카메라를, 다른 한 손에는 배식 도구를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1. 새벽어둠 속에서 2시간을 걸었지만 오를 때는 몰랐다. 그 산이 그렇게 험하다는 것을…. 3월 12일 겨울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이 열리고 있는 러시아 소치의 로자 후토르 알파인센터.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힘든 방법을 택했다. 리프트를 타고 정해진 구역에 내리면 편하지만 그래서는 원하는 그림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오후의 따뜻한 날씨에 눈이 녹아 질퍽거렸다.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졌다. 본능적으로 카메라와 렌즈를 끌어안았다. 장비는 멀쩡했지만 몸은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산을 내려와 앰뷸런스에 몸을 실었다. 응급조치 뒤 다리를 절뚝거리며 닷새 남은 대회 일정을 마쳤다. 패럴림픽에 참가한 한국 장애인선수들의 경기 현장을 렌즈에 담는 것. 그가 20년 넘게 해 온 일이다.

#2. 귀국하자마자 병원부터 찾았다. 오른 무릎 인대가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통원 치료를 받으며 호전이 될 즈음 그는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일주일 뒤 돌아와 다시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나이도 많은데 이렇게 무리를 하면 어떡하느냐. 다친 몸을 먼저 생각해야지 도대체 뭔 일로 해외에 나갔다 왔느냐”며 화를 냈다. 캄보디아에 간 것은 1년 전부터 예정된 ‘희망 원정대’ 봉사를 위해서였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에게 밥도 해 주고 살 곳도 마련해 주는 활동이다. 돼지 암·수컷을 동시에 나눠주기도 한다. 새끼를 낳아 삶의 기반으로 삼으라는 취지에서다. 경기지방경찰청 직원을 포함해 이전부터 함께해 오던 사람들 30여 명과 같이 다녀왔다. 캄보디아, 히말라야, 몽골 등을 돌아다니며 밥을 해 주는 것, 그가 2006년 8월 캄보디아에 처음 다녀온 뒤부터 8년 동안 해 온 일이다.

패럴림픽 사진 봉사 9차례

“종이를 저렇게 물에 막 넣어도 돼요?”

“기다려 봐. 이제 그림이 보일 거야.”

김영길 씨(61)가 태어난 경기 연천군 전곡리 집 옆에는 사진관이 있었다. 친구의 집이었다. 어린 시절 김 씨에게 그곳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친구 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은 놀랍고 즐거운 일이었다. 인화된 사진들을 작두로 반듯하게 잘라내게 됐을 즈음 김 씨는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사달라고 했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무슨 놈의 사진은.” 아버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 아버지를 계속 조르다 맞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카메라를 다시 만진 건 20대 후반이었다. 회사 동호회 ‘결정적 순간’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에 관심을 가진 건 장애인 사진이었다. 회사에서 전시회도 여러 차례 했지만 반응은 별로였다. 이번에는 서울 청량리 등을 다니며 노숙인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몇 번 해보니 시들해졌다. 다시 장애인으로 돌아와 ‘장애인 스포츠’로 주제를 좁혔다. 다행히 다니던 회사는 그가 마음 편히 활동하도록 배려해 줬다. 회사 카탈로그나 캘린더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대신에 장기 해외출장을 허락해 줬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패럴림픽은 그래서 갈 수 있었다. 김 씨는 2012년 런던 패럴림픽까지 여름 대회 6차례, 2006년 토리노부터 2014년 소치까지 겨울 대회 3차례 등 9차례의 패럴림픽 현장을 다녀왔다. 국내에서 열리는 장애인 체육대회도 빠짐없이 따라 다녔다. 대한장애인체육회 공식 사진작가로 동행하기에 항공료와 숙박비 등은 지원을 받지만 따로 돈을 받지는 않는다. 사업체를 오랫동안 비워야 되기에 금전적인 손해를 볼 때도 많다.

3월 소치 대회를 앞두고 그는 한동안 서울 황학동 고물시장을 샅샅이 뒤졌다. 이전까지 갖고 다니던 카메라 장비 가방은 자체 무게만 20kg이 돼 비행기에 실을 때부터 골칫거리였다. 김 씨가 이번에 구한 가방은 군사용 구호약품 박스. 비행기에서 바다로 떨어뜨릴 때 쓰는 가방이라 5kg 정도로 가볍고 방수가 잘된다. 그걸 사서 안에 경첩과 충격 방지용 스펀지를 잘라 붙였다. 밖에도 별도의 잠금장치를 달았다. 그가 이 가방에 넣어 간 각종 장비의 가격은 5000만 원에 이른다. 가벼운 가방이라도 이것저것 넣으면 무게가 43kg이나 된다.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왜 이렇게 많은 장비를 갖고 다니느냐고 묻자 허허 웃는다.

“사진을 잘 못 찍으니 장비라도 좋아야지요.”

김 씨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소속 작가다. 다수의 전국 공모전 입상 경력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직함이다. 전시회만도 100번을 넘게 열었다.

시장 보고 밥 퍼주는 사장님

‘깍두기’를 떠올리게 하는 짧은 머리, 떡 벌어진 어깨, 얼굴의 흉터….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다. 언뜻 보면 주먹으로 먹고사는 사람으로 오해할 법도 하다. 하지만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를 만나면 그런 인상은 금세 사라진다. 김 씨는 경북 포항에 있는 단체급식업체 청아람푸드의 사장이다. 큰 사업체는 아니지만 직원 16명 월급 주고 남은 돈으로 가족과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번다. 아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많이 벌어야 한다. 봉사활동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청년 시절. 그는 첫인상처럼 살았다. 많이 때리고 맞았다. 얼굴의 흉터는 그때 칼에 찔려 생겼다. 두 어깨에도 그렇게 얻은 상처가 있다. 고정 수입은 있어야 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철강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면접만으로 붙었다. 1979년 스물여섯 살이었다.

딱히 배운 기술이 없어 여러 일을 했다. 영선(營繕·시설 개보수)반과 총무과를 거쳤고 관리팀에 영업팀까지…. 영업에 종사하다 보니 수금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가 가면 안 나오던 돈이 척척 나왔다. 그는 “인상 한번 쓰니 돈을 줬다”고 기억했다. 영업을 하고 싶은데 자꾸 수금만 하라기에 그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동안 해 온 게 있으니 퇴직금 대신에 공장 구내식당 영업권을 달라고 했다. 2004년 쉰한 살, 그는 그렇게 ‘밥’과 인연을 맺었다.

2년 뒤인 2006년. 김 씨는 독립을 해 급식업체를 차렸다. 영화배우 정준호 씨가 회장으로 있는 ‘사랑의 밥차’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희망 원정대’와 ‘사랑의 밥차’ 활동으로 해외에 나간 것만 해도 20차례가 넘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정 씨와 함께 후쿠시마 체육관에서 우동만 먹고 있는 이재민에게 전복죽을 해 주러 가기도 했다. 국내에서 밥을 퍼 주는 일은 훨씬 많다. 포항과 서울을 오가며 힘들게 봉사활동을 하는 그를 위해 정 씨가 “포항을 중심으로 영남지역 활동을 도맡아 하시라”며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2012년 5월에 트럭 한 대를 마련해줬다. 2012년 경북 구미에서 불산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그는 현장으로 트럭을 몰고 달려가 밥을 해 줬다. ‘사랑의 밥차’는 세월호가 침몰한 전남 진도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매일 새벽 5시면 포항 죽도시장에 가세요. 그날 만들 1000여 명분의 음식 재료를 직접 고르죠. 우리 사장님 현금만 갖고 다녀요. 외상을 안 하는 대신에 물건이 안 좋으면 바로 바꾸죠. 상인들보다 더 잘 알아요.”

2004년 김 씨가 구내식당 영업을 맡은 뒤부터 10년을 함께 일해 온 청아람푸드 임지혜 실장(52)의 말이다. “사장님이 같이 일해보자고 찾아왔을 때 인상이 너무 험악해 한 6개월 피해 다녔다”는 임 실장은 “이번에 다쳐 돌아온 사장님을 보고 ‘제발 사진 좀 그만 찍으시라’고 걱정하는 직원이 많았다. 인상은 저래도 모든 직원이 ‘영원한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다정하고 속이 깊다”고 귀띔했다.

포항에서 ‘사랑의 밥차’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은 김 씨가 댄다. 이를 위해 매달 회사 이익금의 일정 부분을 적립한다. 현장에서 밥을 퍼 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오른손의 비밀

그의 오른손은 처녀 손처럼 뽀얗고 부드럽다. 너무 약해 2년에 한 번 바꿔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닳아서 구멍이 난다. 김 씨는 1979년 첫 직장에 입사한 지 한 달 보름 만에 기계를 다루다 손 피부가 벗겨지는 사고를 당했다.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을 지역 병원을 몇 곳이나 돌아다니다 시기를 놓쳤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있던 회사 직원이 그의 피부마저 잃어버렸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의 권유로 자가 피부이식을 한 게 의료사고로 이어졌다. 염증이 생길 때마다 도려내다 1년 5개월 만에 손목 아래를 모두 잘랐다. 왼손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글씨 쓰는 것부터 다시 배웠다. 왼손으로 사진을 찍고 밥도 푸는 그는 절단장애인협회 홍보이사이기도 하다. 이 협회 회원들은 그가 해 오고 있는 ‘희망 원정대’ 봉사활동의 주요 멤버다.

“의수를 한 뒤 10년 넘게 장갑을 끼었어요. 그러고도 그 손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죠.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한동안 술만 마시며 인생을 비관하다 사진에 몰두하면서 그런 마음이 사라졌어요. 돌이켜보면 손을 잃어 어둠의 세계에서 나왔고 봉사도 할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죠. 아니면 지금 교도소에 있었을 걸요. 하하. 어때요. 고마운 이 손, 남자 손치곤 참 곱죠?”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사회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