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광화문광장에서 이분들을 만나면 “김치”하고 웃으세요

입력 2013-04-18 03:00업데이트 2013-04-18 08:32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노숙인 생활하다 서울시 ‘희망사진사’ 1호로 활동 최인섭-하성수씨
사진 찍는 데는 익숙하지만 찍히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은 영 어색하다고 했다. 카메라를 든 채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하성수 씨(왼쪽)와 최인섭(가명) 씨. 두 사람은 지난해 사진작가 조세현 씨가 노숙인의 자활을 돕기 위해 서울시와 손잡고 개설한 ‘희망 프레임’ 강좌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서울 1호 희망사진관’의 공식 사진사가 됐다. 쉬는 날인 매주 월, 목요일을 제외하면 광화문광장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1. “아저씨! 지금은 물이 너무 차요. 날 따뜻해지면 그때 오세요.”

초겨울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2011년 11월 어느 날. 최인섭(가명·59) 씨는 걸어서 한강으로 향했다. 100세가 넘은 연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3개월 사이를 두고 돌아가신 이후 2년 가까이 정신을 놓고 살았다. 30년가량 이어진 부모님 병 수발 과정에서 아내와 자식은 자신의 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2년 새 집을 날리고 재산을 탕진했다.그날 입었던 철 지난 양복 주머니에는 10원짜리 동전 하나 없었다. 죽지 못해 사느니 죽는 게 나았다.다리를 배회하던 그를 구청 직원이 발견하곤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만약 “자살하지 말라”고 했다면 물로 뛰어들었을 것 같았다. 헛웃음이 나오면서 마음이 풀렸다.

#2.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아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죠.”

풍족하지는 못해도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성수 씨(63)는 군대를 제대한 뒤 익힌 미장기술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했다. 1996년 이혼한 뒤 혼자 살면서 삶에 대한 의욕을 조금씩 잃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2007년 남동생 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2008년 12월 어느 날 건축현장에 나갔다가 일을 놨다. 모든 게 귀찮았다. 동생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영등포 쪽방촌에 몸을 뉘었다. 2개월 정도 살다 이듬해 2월 노숙인 시설인 ‘보현의 집’에 들어갔다. 노숙인들에게는 일종의 ‘보충대’인 이곳에 머물다 ‘길가온 혜명’으로 옮겼다. 노숙인이라는 딱지를 4년이나 달고 살게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

○ 2013년 봄, 광화문 ‘희망사진관’

지난달 28일 광화문광장에서는 ‘희망사진관’ 개소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하성수 씨, 최인섭 씨, 박원순 서울시장, 조세현 사진작가.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고객님, 그건 아웃포커스라는 사진기법입니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배경을 일부러 흐리게 한 거예요.”

최 씨가 친절하게 연거푸 설명을 했지만 손님은 막무가내였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시 찍어 드리죠. 하 형, 한 번 더 부탁해요.”

“그래요. 최 형. 내 금방 찍고 오리다.”

옆에 있던 하 씨가 손님 손을 이끌고 세종대왕 동상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는다.

최근 광화문광장 한복판에는 ‘희망사진관’이라는 간판을 단 작은 공간이 생겼다. 지난달 28일 개소식을 했고 광화문광장을 찾은 관광객과 시민들을 상대로 기념사진을 찍어 판매한다. 희망사진관 안에는 사진 출력을 위한 노트북과 프린터, 그리고 작은 테이블과 의자 2개가 놓여 있다. 하 씨와 최 씨는 번갈아 가며 한 사람은 이곳을 지키고 한 사람은 세종대왕 동상, 충무공 동상, 광화문 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고급 인화지로 출력을 해주고 받는 돈은 2000원. 같은 사진을 추가로 뽑을 때는 1000원만 더 내면 된다. 사람이 많이 오는 주말 내내 일을 하고 월요일과 목요일은 쉰다.

잠시 후 돌아온 하 씨가 최 씨에게 메모리 카드를 건넸다. 다시 찍은 사진을 건네받은 손님이 비로소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동안 다시 찍어 달라는 손님 없었는데…. 그래도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 드려야죠. 요즘 이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하 씨)

“외국인이 전체 손님의 80%쯤 되는 것 같아요. 옆에 있는 ‘나도 임금이다’ 코너에서 옷을 빌려 입은 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분이 많죠.”(최 씨)

두 사람이 착용한 모자와 조끼에는 ‘희망사진사’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서울시 마크도 새겨져 있다. 최 씨와 하 씨는 지난해 조세현 사진작가가 재능기부 차원에서 서울시와 함께 개설한 ‘희망의 프레임’ 강좌의 초·중급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덕분에 ‘서울 1호 희망사진관’의 전속사진사가 됐다. 경쟁률은 수십 대 1에 달했다. 조 작가는 2010년 영국 왕실 주최의 사진전에서 만난 유명 작가가 노숙인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진을 통해 노숙인의 자활을 돕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 작가는 이런 아이디어를 서울시에 제안했고 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강좌가 마련됐다.

“광화문광장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는 소외계층 분도 많아요. 왜 옷차림만 봐도 딱 알잖아요. 그런 분들에게는 사진을 무료로 찍어 드려요.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하죠. ‘서울시에서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서비스하는 겁니다’라고요. 그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껴요. 삶을 포기하려던 제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니, 참 인생이란 게 모를 일이죠.”(최 씨)

○ 노숙인들 자활의 꿈 담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다 보현의 집으로 들어간 최 씨는 “밥 몇 끼 얻어먹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젊을 때 해운회사와 건설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한때는 어학원까지 차려 ‘원장님’ 소리를 들었던 그였다. 당장 돈부터 다시 벌어야 했다. 3개월짜리 공공근로부터 시작을 했다. 노숙인도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한다.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노숙인 밴드 모임에도 참여했다. 한때는 여덟 가지 일을 병행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몸을 지치게 만들어야 상념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지난달에는 드디어 개인회생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나면 예전에 살았던 서울 신촌에 반지하 월세방이라도 얻는 게 작지만 큰 소망이다.

하 씨는 지난해 12월 서울시가 노숙인을 대상으로 공모한 민들레문학상 사진 부문에 당선됐다. 부상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의 매입임대주택 입주권을 받았다. 보증금은 서울시가 내줬고 매월 9만5000원을 부담하는 조건이다. 2009년 2월 보현의 집을 시작으로 시설 노숙인이 됐던 그는 4년 만인 올 2월 임대주택으로 이사하면서 노숙인을 벗어났다.

“원래 사진을 좋아했는데 잘 찍지는 못했어요. ‘희망 프레임’ 강좌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난 거죠. 시설에 들어간 이후로 자식들과도 연락을 끊었어요. 못난 아버지가 돼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기는 싫었거든요. 이제는 만나고 싶어요.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니까요.”(하 씨)

광화문광장에서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고 사진을 찍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희망사진사 일을 시작하기 전 3개월짜리 공공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이다. 공공근로를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사진을 배웠는데 결과적으로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공공근로를 하게 됐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자활지원과 김건태 시설팀장은 “일단 3개월 계약한 것은 맞지만 ‘희망사진사’ 위촉 기간은 12월 27일까지다. 어렵게 그 자리까지 왔으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최대한 안정적으로 지원을 할 계획이다. 최소 2년은 광화문에서 사진을 찍으실 수 있도록 하겠다. 그래야 다른 노숙인들도 이분들을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매달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사진을 찍고 받은 돈은 일단 보현의 집에 적립하고 있다. 이 중 40%는 잉크나 인화지 등 소모품을 사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인센티브로 나눠 줄 예정이라고 김 팀장은 덧붙였다.

○ 헤어진 아들 다시 만나고 싶어

서울에만 5000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노숙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서울역 등에서 볼 수 있는 거리 노숙인과 흔히 쉼터라고 불리는 시설에 거주하는 시설 노숙인이다. 거리 노숙인에 비해 시설 노숙인 가운데는 사회 복귀를 꿈꾸는 사람이 많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많은 노숙인이 신용불량이라는 딱지를 떼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한데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이들이 그런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시설로 돌아가면 ‘사진 찍는 일은 할만 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힘들다는 말은 안합니다. 아니, 못합니다. 보란 듯이 워크아웃에 성공해 시설을 나올 때까지는 말입니다. 보현의 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큰 통신회사 부장으로 있던 사람인데 사업을 하다 망해 노숙인이 됐더라고요. 지난해 1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신도림역 앞에서 떨고 있다 시설로 왔어요. 정말 사람 일 모르는 겁니다. 그나마 그 친구는 금세 정신을 차렸고 얼마 안 있어 동생이 데려갔어요. 가족이라는 마지막 끈이 남아 있었기에 노숙생활을 단축할 수 있었던 거죠. 헤어진 아내야 진작 남이 됐지만 아들하고는 다시 연락을 하고 싶어요. 내가 끊어버린 희망의 끈을 내 손으로 잇고 싶습니다.”(최 씨)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았다. 노숙인 시설에서 맞은 봄은 봄이 아니었다. 주위의 차가운 시선은 늘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2013년 봄. 유달리 길고 모질었던 겨울을 보낸 광화문광장에 꽃이 피고 있다. 그곳에 가면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희망사진사’가 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사회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