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희망’을 굽는 제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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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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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한국제과학교, 장애인 대상 제빵교육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장애인 제빵학교 실습실에서 지체장애인 기승훈 씨(가운데 모자 쓴 사람)가 오전에 구운 빵을 오븐에서 꺼내고 있다. 기 씨는 이 학교에서 제빵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제빵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영등포구 제공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장애인 제빵학교 실습실에서 지체장애인 기승훈 씨(가운데 모자 쓴 사람)가 오전에 구운 빵을 오븐에서 꺼내고 있다. 기 씨는 이 학교에서 제빵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제빵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영등포구 제공
《 10년 동안 간직했던 꿈이 있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식빵을 구워 동네 사람들에게 팔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은 동네 빵집에라도 취업해 일을 배우고 싶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장님들은 번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 내려간 곳은 충북 청주시. 당시 스무 살이었던 기승훈 씨(33)의 꿈은 이렇게 시작됐다. 빵집 사장이 되고픈 기 씨의 꿈은 험난하기만 했다. 》
초등학교 2학년 때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는 오른쪽 팔다리를 편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돼 지체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어깨 너머로라도 빵 굽는 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기 씨는 허드렛일을 맡는 게 전부였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밀가루 반죽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작은 실수라도 할까봐 오븐에 빵 굽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 장애인 제빵학교에서 다시 꿈을 찾다

10년 동안 동네 빵집을 전전했지만 결국 기 씨는 자기 손으로 빵 한번 제대로 구워보지 못했다. 꿈을 버릴 수 없어 제빵학원에도 등록했지만 감당하기 힘든 학원비 때문에 오래 다니지 못했다. 좌절을 거듭하던 기 씨가 다시 꿈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우연히 알게 된 영등포구의 장애인 제빵학교 덕분이었다.

영등포구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인가한 전국 유일의 제과 교육기관인 한국제과학교와 지난해 9월부터 장애인 제빵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한국제과학교는 전국에 8명밖에 없는 제과 명장 가운데 4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김영모과자점의 김영모 대표를 비롯해 리치몬드제과 권상범 대표이사도 이곳 단기과정을 이수했다.

영등포구는 장애학생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학교 졸업 이후 안정적인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해 서울에서 최초로 지체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제빵교육을 하고 있다. 기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이곳에서 제빵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10년간 마음속에 묻어 둔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

○ 내년부터 교육청과 손잡고 사업 확대

3일 오후 영등포구 신길동 한국제과학교 실습실에서는 초코칩 쿠키 만들기 수업이 한창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서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8명의 발달장애 학생이 쿠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저울에 재가며 반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3시부터 3시간에 걸쳐 밀가루 반죽부터 쿠키 모양 틀로 찍어 오븐에서 구워내기까지 수업을 들었다. 기 씨는 이번 달에 예정된 제빵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오전반에 이어 오후반 수업에도 참석하는 열의를 보였다. 고소한 빵 냄새를 풍기는 실습실에 모인 학생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발달장애 2급 김동균 군(19)은 “나중에 빵집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장애인 제빵학교에는 간질과 뇌병변, 자폐 증상을 보이는 발달장애 학생 44명과 지체장애인 2명 등 총 46명이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듣고 있다. 영등포구는 내년도부터 시교육청과 함께 고등학교 3학년생을 위한 제빵수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저소득층 학생을 비롯해 특수교육 대상자 10명 등 총 50명의 고3 학생에게 제빵수업을 실시하기로 했다. 제과학교에서 장애인들에게 제빵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 오세욱 씨(30)는 “이들이 배우는 속도가 비장애인보다 더디지만 스스로 꿈을 키워나갈 수 있게 도울 수 있다는 점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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