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권리와 국가의 강제를 어떻게 균형 잡을 것인지 쓰라는 건데 어려워 죽겠더라.… 논술고사 때문에 이런 문제도 깊이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고….”
20일 오후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대구로 가던 여고생은 전화로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실시한 수시모집 논술고사가 주제였던 모양이다.
이 학생은 기자에게 “논술 준비는 진짜 힘들지만 논술고사가 있는 대학이 ‘주요 대학’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고교생 사이에 많다”고 했다. 대구 경북에 있는 50여 개 대학 중 논술고사를 보는 대학은 한 곳도 없으니 ‘주요 대학’도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경북대는 지난해까지 실시한 논술고사를 올해 폐지하고 그 대신 대학진학적성검사(AAT)를 19일 실시했다.
서울의 대학들이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논술고사를 시행하는 이유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다. 제시문을 분석적으로 이해한 뒤 1800자 안팎의 글을 써보도록 하면 비판적 사고력과 논리력, 표현력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효과적인 기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술고사에는 이른바 ‘물 수능’을 보완하는 변별력을 통해 우수 학생을 선발한다는 대학 쪽 기준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고교 3학년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더라도 학생들이 개인의 권리 의무와 자유, 사회 정의, 다문화 사회 등 우리 사회의 굵직한 이슈에 대해 깊게 사고하고 생각을 정리해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통섭의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인문계든 자연계든 결국 읽고 쓰기에서 실력이 판가름 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평소 대구 경북을 ‘교육의 고장’이라고들 하지만 “논술을 통해 지역 학생들의 사고력을 높이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런 점에서 아쉽다. “우수한 학생들이 지역 대학을 외면하고 서울의 대학으로 몰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은 본질을 통찰하지 못한 겉핥기식 비판이라는 생각이다.
대구시교육청과 경북도교육청은 초중고교 교육과정에 독서와 글쓰기를 강화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입 논술에서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지역 대학들도 변별력 확보라기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갖는 교육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독려하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한다. 대구 경북이 교육의 고장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려면 이런 것부터 차별화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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