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굳어지는 희귀병 ‘20년째 침대생활’ 33세 김천수 씨의… ‘溫’라인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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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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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이 굳어가는 희귀질병인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김천수 씨.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20년째 침대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대양을 누비는 게임 ‘대항해시대’를 통해 세계여행의 꿈을 키우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근육이 굳어가는 희귀질병인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김천수 씨.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20년째 침대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대양을 누비는 게임 ‘대항해시대’를 통해 세계여행의 꿈을 키우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삐, 삐.’ 거실 한쪽 인공호흡기에서 소리가 났다. “천수가 호흡이 불규칙하면 이 기계가 소리를 내줘요. 그러면 더 크게 호흡을 내쉬면서 숨을 고르죠.”

24일 오후 7시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한 임대아파트 9층. 김천수 씨(33)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몸에 소변 호스를 꽂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옆에서 어머니 김화순 씨(56)가 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근이영양증. 아들 김 씨가 앓고 있는 병이다. 근육이 굳어가는 희귀 난치병으로 아직까지 이렇다 할 근본적 치료법과 약이 없다. 김 씨는 여덟 살 때 처음 이 병을 진단 받았다. 그땐 그래도 조금이나마 걸을 수 있었지만 열한 살이 되던 해부터는 아예 걷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는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김 씨가 할 수 있는 몸짓의 전부다. 누워서 지내는 침대생활만 20년째다.

○ 게임을 통해 세계일주를

김 씨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 육체는 누워 있지만 정신은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교역을 하고 땅을 사고 때로는 해적들과 싸우는 ‘정복자’다. 아이디 ‘해와달’이라는 게임 속 아바타가 김 씨의 분신이다. 6년 전 같은 병으로 함께 치료를 받아온 최병호 씨(33)가 게임 ‘대항해시대’를 소개하며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 것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이 게임은 배를 타고 오대양을 누비며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게임을 시작한 뒤 김 씨는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움직여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유럽, 아프리카, 인도 등을 오간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아주 멋있는 것 같아요. 인도에는 후추와 사파이어를 사러 가요. 그것을 다른 아시아 국가에 팔고 아프리카에도 조금씩 팔죠.”

한때 김 씨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아픈 몸으로 게임까지 하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들의 얘기를 듣고는 차마 막을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해요. 모두가 동등한 게임 이용자일 뿐이죠.”

가상 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가여워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는 얘기다. 그곳에서 그는 그저 ‘해와달’일 뿐이다.

○ 기적과도 같은 인연


지난해 김 씨의 어머니마저 갑자기 쇠약해졌다. 오랜 기간 아들 간호에 매달리다 미처 본인 몸은 돌보지 못했던 것. 원래 있던 허리 디스크는 더 심해졌고 목 디스크까지 왔다. 의사는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몸에 마비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수술비와 치료비를 합해 1800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46m²짜리(약 14평) 임대아파트에 사는 김 씨 가족의 형편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돈이었다. 앞이 깜깜해졌다.

이때 ‘대항해시대’ 친구들이 나섰다. 같은 게임 이용자 박신구 씨(34)는 김 씨의 딱한 상황을 게임 커뮤니티에 올렸다. 박 씨도 심한 근이영양증 환자로 손가락까지 마비돼 발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발가락으로 한 글자씩 눌러 쓴 사연은 게임 이용자들을 울렸다.

김 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온라인에서 확산되면서 ‘대항해시대’를 운영하는 CJ E&M과 구호단체 월드비전, 야후의 온라인 기부사이트인 나누리가 함께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 동안 1000만 원을 모았다. 여기에 CJ 측은 보름 동안 대항해시대 게임 아이템을 판매한 수익 400만 원 전액과 임직원들이 모은 400만 원을 보태 지난달 1800만 원을 김 씨 가족에게 전달했다. 김 씨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연만 듣고 이렇게 도와주는 것에 너무 놀랐고 마음이 따뜻해졌다”며 “병이 나으면 꼭 다른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가 게임에서 만난 인연은 박 씨뿐만이 아니다. 대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의사 양진배 씨는 김 씨의 상태를 알고 5년째 꼬박꼬박 한약을 지어 보내주고 있다. 누워 지내는 김 씨의 목에 가래가 끓지 않도록 도와주는 약이다.

요즘 김 씨는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인 게임을 못하고 있다. 손으로 마우스를 흔들 힘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속엔 ‘세계 정복’의 꿈과 소중한 친구들 생각이 가득하다. 꼭 병을 이겨내 게임에서 본 세계를 직접 누비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지금은 누워 있지만 나중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시간으로 생각할래요.”

송인광 기자 l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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