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거’ 79주년… 순국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29일 03시 00분


‘義士의 최후’ 그 시각 그 자리 서니, 의연했던 모습 눈앞에…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石川) 현 가나자와(金澤) 시 미쓰코지(三小牛) 육군작업장 내 서북골짜기. “처형은 각오했고 할 말은 없다.” 그러곤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탄은 십자 모양의 형틀에 무릎 꿇린 채 묶여 있는 청년의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청년 윤봉길(1908∼1932)의 장엄한 최후. 일본군은 인근 노다야마(野田山) 공동묘지로 윤 의사의 시신을 옮겨 암매장하고 은폐했다. 광복 직후 1946년 윤 의사 유해봉환단은 그의 유해를 찾아내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하지만 순국 장소(처형장)의 위치는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일본 자위대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 동상
윤봉길 의사 동상
2011년 4월 24일 오전 8시 20분.

“맞아! 여깁니다.” 짧은 탄성이 울렸다. “사진에 나오는 그 각도입니다. 사진 속 빛의 방향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바로 이 자리. 일본 헌병 뒤통수에 비친 빛. 저기 태양을 보세요. 바로 그 방향입니다.”

윤 의사 최후의 장소의 정확한 지점(북위 36도 31분 30.14초, 동경 136도 40분 17.91초)을 확정하는 순간. 윤 의사 순국 79년 만의 일이다. 윤 의사의 처형 사진을 들고 있는 근대사 다큐멘터리 전문 김광만 PD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동행한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양승학 사무처장, 재일(在日) 윤의사암장지보존위원회의 박현택 회장과 김진수 부회장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김 PD는 올해 2월 이곳을 찾아낸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무릎까지 쌓인 폭설과 악천후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윤 의사 처형 관련 비밀기록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수록된 처형장 도면의 방위와 처형장 사진에 나오는 빛의 방향 등에 관한 의문점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 다시 가나자와 현장을 찾은 것이다.

기자가 현장 조사에 합류한 것은 23일. 이날 오후 1시 42분 오사카(大阪)발 가나자와행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비가 내렸다. 윤 의사는 처형 하루 전인 1932년 12월 18일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에서 가나자와 처형장 인근 구금소로 이송됐다. ‘그때 스물네 살의 청년 윤 의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나자와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가나자와역에서 자동차로 15분. 길이 좁아지더니 ‘미쓰코지 육군작업장’ 표지판이 나타났다. 앞으로는 철조망 문이 굳게 가로막고 있었다. 출입문 옆 좁은 틈새를 통해 안쪽 길로 들어섰다. 700∼800m 걸어가자 오른쪽으로 실내사격장 건물이 나왔다. 사격장 주변으로 또 하나의 철조망이 삼엄하게 쳐져 있었다.

오늘 의거 79주년… 순국 지점 국내언론 첫 촬영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 육군작업장 내 서북 골짜기에서 총성이 울렸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윤 의사의 의거 79주년(29일)을 앞두고 그동안 불확실했던 순국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24일 현장을 찾은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윤 의사 순국지 조사팀. 왼쪽부터 김광만 PD, 양승학 사무처장, 윤의사암장지보존회의 김진수 부회장과 박현택 회장. 가나자와=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오늘 의거 79주년… 순국 지점 국내언론 첫 촬영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 육군작업장 내 서북 골짜기에서 총성이 울렸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윤 의사의 의거 79주년(29일)을 앞두고 그동안 불확실했던 순국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24일 현장을 찾은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윤 의사 순국지 조사팀. 왼쪽부터 김광만 PD, 양승학 사무처장, 윤의사암장지보존회의 김진수 부회장과 박현택 회장. 가나자와=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내리막 샛길로 150m를 걸어 들어갔다. 숲이 무성했고 사위는 적막했다. 오른쪽에 완만한 계곡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사격장 건물과 철조망이 다시 나타났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만밀대일기’ 도면의 동서남북 방향과 사진상의 빛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4일 오전 8시 20분 다시 현장을 찾았다. 햇빛이 투명했다. 현장에 도착해 수풀을 헤치고 철조망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비 내리던 23일엔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철조망에 의지해 사격장 건물 쪽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철조망 안쪽으로 처형 사진에 나오는 지형이 그대로 펼쳐졌다.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만밀대일기’에 나오는 방위와 동쪽 길 뒤쪽 낭떠러지 방향까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사진에 나오는 빛의 방향, 윤 의사를 겨눈 일본 헌병 뒤통수에 비치는 햇빛의 방향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모든 의문이 완전히 풀렸다.

재일교포 박 회장은 눈물을 글썽였다. “정확합니다. 이제 성역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일부 언론과 연구자들이 현장을 소개했지만 정확하지 못했다. 자위대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근처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었다. 이곳 철조망의 모습이다. 사격장 철조망은 건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직선으로 둘러쳤는데 유독 이곳만 불룩 튀어나와 있다. 튀어나온 부분은 정확하게 윤 의사 순국 지점을 감싸고 있었다. 양 처장은 “일본 자위대가 어떤 형식으로든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거나 한국인의 접근을 금지하려고 이렇게 철조망을 친 것 같다”고 추정했다.

현장에서 조사팀 모두 “이제는 성역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철조망 앞에 순국 지점 표석을 세우고 동쪽 낭떠러지 아래쪽 군사지역 바깥의 땅을 매입해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나자와를 찾는 한국 관광객이 매년 30만 명이나 된다는데 가나자와에 윤 의사 순국지와 암장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럴 순 없습니다. 내년이 윤 의사 순국 80주기인데 서둘러야 합니다.” “일본 교포사회와 한국이 모두 나서서 성역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손정의 회장도 만나 협조를 요청하겠습니다. 이곳을 우리 민족의 성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한 시간쯤 머문 뒤 조사팀은 현장을 나와 3km 정도 떨어진 윤 의사 암장터로 향했다. 현장을 떠나며 김 PD는 이렇게 말했다. “가나자와는 참 날씨가 궂은 곳인데 이렇게 해가 쾌청한 것은 처음 봤습니다. 윤 의사를 이렇게 만나는군요.”

가나자와=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국회 ‘윤봉길 특별전’ 개막 ▼

28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는 ‘윤봉길 의사 항일 의거 기념 국회 특별전’이 열렸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개막식에서 “윤 의사는 단순한 애국자가 아니라 20대 나이에 투철한 교육관과 심오한 이념을 지닌 사상가이자 농민운동가였다”고 평가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애국심에 감복…90년 中서 첫 기념식 열어”
22년간 尹의사 알리고 기려온 중국인 양신화 씨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上海) 의거가 29일로 79주년을 맞는다. 한 중국인이 20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윤 의사를 기념하고 알려와 화제다.

주인공은 양신화(楊新華·66·사진) 상하이 국제우인연구회(國際友人硏究會) 이사 겸 부비서장. 양 부비서장은 22년 전부터 의거가 발생한 루쉰(魯迅)공원(옛 훙커우공원)의 매헌 정자와 기념비, 매원 등의 건립과 조성에 직접 관여하는 등 윤 의사를 알리는 데 노력해 왔다.

그는 상하이 시정부 아시아처 부처장이었던 1989년 3월 윤 의사의 동생 윤남의 씨의 요청으로 루쉰공원에서 윤 씨를 만나 윤 의사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양 부비서장은 윤 의사 이야기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상하이 역사의 중요 부분인 윤 의사 의거를 연구하고 기념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한중 국교 수립 전인 1990년 의거 현장에서 첫 기념식을 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또 1994년 윤 의사 기념건물 ‘매정’을 건립하고, 1995년 매정 주위에 매화나무 8만 그루를 심어 ‘매원’이라는 정원을 조성했다. 또 1998년에는 매정 입구에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비’를 세웠고 매정 안에 윤 의사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는 데 적극 도움을 줬다.

암으로 투병 중인 양 부비서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윤 의사는 한국과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역사적 인물로 중국인인 우리가 오히려 감사하다”며 “남은 생애를 윤 의사 연구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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