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21일 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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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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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봤어?” 王회장 도전정신 DNA로
“해보자!” 현대家 車-조선 쾌속질주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현대차는 ‘싸구려’의 대명사였다. 리콜 요청이 쇄도했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결정을 현대차 구매 결정에 비유하곤 했다. 1986년 미국 진출과 동시에 ‘엑셀’ 16만 대를 팔아치운 현대차의 판매는 계속 감소하더니 1998년엔 간신히 9만 대를 넘겼다. 미국 진출 이후 10만 대 아래로 떨어진 건 처음이었다.

1999년 현대자동차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미국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은 한국에서 열심히 만들어낸 차량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 회장은 곧바로 ‘품질경영’을 시작한다. 그러기를 10여 년,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 미국에 모두 89만 대의 자동차를 팔았다. 1998년에 비해 10배가 늘었다.

21일은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타계 전 해에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아산이 이룩한 현대그룹은 크게 현대차, 현대그룹, 현대중공업 등으로 쪼개졌다. 그룹의 뿌리였던 현대건설은 매각되는 시련을 맞았고, 1990년대 1등이었던 전체 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도 삼성그룹에 밀리면서 1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쪼개진 범현대가 기업들은 ‘해봤어?’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로 요약되는 아산의 도전정신과 끈기, 신념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예전의 영광을 회복해나가고 있다. 현대건설도 다시 현대가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산이 타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의 경영철학과 한국을 한 단계 끌어올린 유전자(DNA)가 다시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 현대차의 뚝심

1999년 당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함께 인수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둘러보며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1999년 당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함께 인수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둘러보며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미국에서 실망하고 돌아온 정몽구 회장은 1999년 미국시장에 ‘10년 10만마일 워런티’를 내세웠다. 현대차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충격요법’ 내지는 ‘벼랑 끝 전략’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도요타나 혼다 등 일본의 경쟁사들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당시의 서비스는 ‘2년 2만4000마일 워런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차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밀고 나갔다. 10년이 지나 현대차의 10만 마일 서비스는 결국 성공으로 판명됐다. 비웃던 경쟁 회사들이 서비스 기간과 마일리지를 늘리며 현대차를 따라오고 있다.

10여 년 전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를 물려받았을 때 아무도 세계 5위(기아차 포함 2009년 기준)의 자동차회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7일 미국에서 발표된 현대차의 내구품질 순위도 일반 브랜드 중 도요타와 뷰익에 이어 3위고 기아차도 9위를 차지했다.

김신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현대차그룹의 성장에는 아산의 개척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며 “과감한 결단과, 일단 결정을 내리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기업가 정신이 정 명예회장의 기업철학이고 그게 지금의 현대차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과감함은 실적으로 나타났다. 아산이 타계한 2001년 현대차그룹의 매출액은 45조9000억 원이었으나 2009년 94조6500억 원으로 늘었다. 2000년 2조8600억 원이던 순익 규모는 2009년 8조4300억 원이 됐다.

○ 현대중공업의 혁신

1983년 당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건조 중인 대형 선박의 프로펠러 위에 직접 올라가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1983년 당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건조 중인 대형 선박의 프로펠러 위에 직접 올라가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아산의 진취적인 기질을 가장 많이 계승한 건 현대중공업이다. 1971년 아산이 조선업에 진출하려고 했을 때 걸림돌은 돈이었다. 아산은 몇몇 국가와 끈질긴 협상 끝에 영국과 스위스에서 1억 달러의 차관을 받아낸다. 하지만 영국 금융권에서는 그 당시 전무한 수주실적을 요구했다. 이에 아산은 그리스로 날아가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으로 260만 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현대중공업은 이후 조선 분야에서는 줄곧 세계 1위를 지켰지만 시장이 한정된 조선 분야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배는 잘 만들지만 선박용 엔진은 수입하던 현대중공업은 1990년부터 10여 년 동안 총 40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2000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독자개발 엔진인 ‘힘센엔진’의 개발을 완성했다. 또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뛰어들었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산업용 로봇을 생산하며 KTX 등의 핵심 설비인 전기 추진 장치도 만든다. 이 덕분에 아산 타계 당시 전체 매출의 50%에 이르던 조선분야 매출을 30% 선으로 낮출 수 있었다.

김진수 중앙대 창업경영대학원 교수는 “아산의 경영은 혁신성 진취성 위험감수성으로 정리되는데 범현대가 기업들은 여기에 글로벌한 경영감각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전체 매출액은 2001년 8조4000억 원에서 2010년 말 기준 50조 원으로 늘어났다.


○ 대북사업과 흩어진 가족

겉돌고 있는 대북사업과 화합하지 못하는 현대가는 아산의 뜻을 잇지 못한 아쉬운 부분이다. 1998년 6월의 역사적인 ‘소떼몰이’ 방북으로 대표되는 아산의 숙원인 대북사업은 정몽헌 회장의 자살과 정치적인 이유로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가족적인 가치를 매우 중시하던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 이후 갈등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현대가의 숙제다.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앙금이 깊어진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아직도 갈등의 골이 깊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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