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보험공사가 삼화저축은행 고객을 대상으로 가지급금 지급을 시작한 26일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삼화저축은행 신촌지점을 찾은 고객들이 번호표를 들고 상담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아들 결혼자금을 날리게 생겼는데, 아들한테도 얘기 못하고 죽을 노릇입니다. 경비를 서면서 늘 봐 온 저축은행이어서 매달 꼬박꼬박 돈을 넣었는데….”
곽봉근 씨(64)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인근 빌딩의 경비로 일하면서 우량 저축은행이라는 직원 말만 믿고 노후자금을 모두 쏟아 넣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하소연했다. 젊고 똑똑한 사람들은 부실 문제를 눈치 채고 일찌감치 예금을 인출했지만 원금과 이자를 합쳐서 5000만 원까지만 보장하는 예금자보호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순진하게 은행만 믿고 버텼다는 얘기다.
삼화저축은행의 영업 정지로 피해를 본 고객에게 가지급금(임시로 예금액의 일부를 미리 받는 돈)이 지급되기 시작한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삼화저축은행의 본점은 이른 아침부터 예금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이날 삼화저축은행 삼성동 본점과 신촌지점에서 가지급금을 신청한 고객은 모두 4300여 명에 이르렀다. 본점의 경우 새벽부터 2000여 명의 고객이 몰려 이 중 300여 명만 돈을 타가고, 나머지는 번호표를 받아갔다. 고객 대부분은 곽 씨와 같은 60, 70대 노년층이었다. 초조한 표정의 어르신들은 사람들이 몰려 엘리베이터 운행이 지연되는 것에도 짜증 섞인 말투로 “부실 엘리베이터 아냐”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형광색 복장과 흰색 안전모를 쓴 한 환경미화원은 저축은행 사무실 앞에서 서성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는 “이 일대를 40년간 청소하며 은행 간판만 믿고 돈을 맡겼다”며 “내 예금이 5000만 원 이하여서 모두 돌려준다고는 하지만 불안감을 달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손을 잡고 온 노부부와 지팡이를 짚고 온 노인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들은 “예금을 찾는데 왜 위임장이 필요한가” “계좌번호는 서류에 적어 왔는데 왜 통장이 필요한가” 등의 질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물었다.
삼화저축은행 피해자 모임 대표인 정은숙(가명) 씨는 “대부분 나이가 많은 분이어서 예금자보호법을 잘 모르신다”며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오늘 저축은행 곳곳에 27일 회의를 하자고 대자보를 붙였다”고 말했다. 삼화저축은행 인수 경쟁에 우량 금융지주회사 3곳이 뛰어들었지만 5000만 원을 초과하는 예금에 대해선 삼화저축은행의 부실 비율에 따라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 이들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삼화저축은행 본점은 금융당국의 감독 실패를 성토하는 목소리로 하루 종일 어수선했다. 자신을 전직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한 80대 남성은 “이 지경이 되도록 금융감독원은 뭐 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사전에 감독을 철저히 해서 부실한 점이 있으면 시정명령을 내리고 고객에게 정확한 정보를 줬어야 했다”며 “정부 잘못인지 저축은행 잘못인지를 잘 따져 비슷한 사고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와중에 다른 저축은행의 영업사원들이 예금 고객들이 받은 가지급금을 신규 예금으로 유치하려는 영업 경쟁도 벌어졌다. 삼화저축은행 입구에는 다른 은행 영업사원들이 연이자율을 4.7%에서 4.8%로 높였다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며 삼화저축은행에서 자신들의 저축은행으로 ‘갈아타기’를 권유했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삼화 고객들이 금리를 따지기 전에 ‘너희는 우량하냐’는 질문부터 던진다”며 “이제 겁나서 못 맡기겠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전했다. 예금보험공사에서 파견을 나온 한 관계자는 “과거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례에 비해 고객의 불안심리가 더 큰 편”이라며 “언론에 저축은행 정리의 신호탄이란 분석이 나오며 다른 은행에 인수마저 안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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