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 20년’ 경험에서 배운다]<4·끝>서독의 통일정책이 남한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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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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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주면 꼭 하나 받는다” 상호주의 원칙이 동독 빗장 풀다

동서독 가르던 ‘체크포인트 찰리’ 관광명소로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서독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이듬해 6월 철거됐으나 관광객이 몰리자 복원했다. 성조기를 들고 있는 병사도 호객용이다. 베를린=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동서독 가르던 ‘체크포인트 찰리’ 관광명소로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서독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이듬해 6월 철거됐으나 관광객이 몰리자 복원했다. 성조기를 들고 있는 병사도 호객용이다. 베를린=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 “우리는 유럽의 통일을 추구하고 동시에 전체 독일인들에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해 독일 통일과 자유를 완성하도록 촉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기본법의 통일조항이) 독일인들의 소망과 의지, 나아가서는 동경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2년 2개월 전인 1987년 9월.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을 본으로 불러들여 정상회담을 가진 뒤 만찬연설을 통해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 연설은 서독뿐만 아니라 동독 전체 주민에게도 생중계됐다. 콜은 “우리의 연설이 생중계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서독 방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사전에 호네커를 설득했다. 》
○ 상호주의로 동독을 아래로부터 바꿔

당시 호네커는 서독이 요구하는 ‘상호주의’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태였기 때문에 연설 생중계 같은 작은 문제를 놓고 콜과 신경전을 벌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1982년 권좌에 오른 콜은 사민당 정권의 동방정책을 비판적, 창조적으로 수용했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콜은 서방과의 결속 강화, 자유민주 시장경제의 우월성 강조, 그리고 상호주의를 3대 기반으로 우방국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자신의 보수적 ‘독일정책’을 확립해 나갔다”며 “그 핵심은 동독에 대해 실용주의적 협력을 계속하는 동시에 규범적 공세를 전개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콜은 서독의 체제 우월성을 부각하면서 교류협력을 대폭 확대해 나갔다. 특히 동독에 대한 대규모 재정 지원은 계속했지만 규모가 크건 작건 이에 상응하는 동독의 인도적 화답을 대가로 얻어냈다. 겉으로 보기에 서독은 조건 없이 지원하고 동독은 자발적으로 조치를 취한 것이었지만 명백한 정치적 거래였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로 재정파탄에 빠진 동독은 ‘독이 든 사과’임을 알면서도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콜 정부는 1983년 국제 자본시장에서 신용도가 떨어진 동독 정부가 외국 은행에서 1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보증을 서는 것을 시작으로 동독 정부에 각종 경제적 지원을 한 뒤 △동서독 주민의 자유 왕래 △동독 탈출 주민에 대한 자동사격장치 제거 △양국 간 사회 문화 교류 확대 등의 양보를 얻어냈다.

동독 정부가 정치범을 서독에 넘기는 대가로 물품을 지원하는 ‘프라이카우프’도 콜 시대에 더욱 확대됐다. 이 결과 동독은 196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3만3755명의 정치범을 서독에 넘겼고 서독은 그 대가로 약 35억 마르크를 제공했다.

○ 북한을 상호주의로 바꾸려면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을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압박정책도, 북한에 무조건 퍼주자는 온정주의 정책도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며 “줄 것은 주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콜식 상호주의야말로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바람직한 방법론”이라고 말했다.

콜의 상호주의가 실현된다면 남한은 북한에 대한 식량 등 경제지원을 대가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및 상호 고향 방문 확대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 장사정포 제거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초소 이동 등) △남북한 주민 상호 자유 방문 여행 △임진강과 한강 등 공유하천 공동 관리 등을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우선 상호주의에 따른 거래 방식을 북한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북한이 지금은 상호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으나 북한으로서도 내부 붕괴를 막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서는 남한과의 상호주의를 점차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만큼 인내심을 갖고 설득해야 한다.

남한 내부도 설득해야 한다. 민주당 등 일부 정치세력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처럼 연간 쌀 40만∼50만 t, 비료 30만 t을 북한에 주자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반면 보수 진영은 북한에는 어떤 이유로도 쌀 등 경제지원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찬반 양론을 아우르는 상호주의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북핵 문제 해결을 우선에 두는 미국과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흔들림 없는 한미 공조도 이뤄야 한다.

▼ 서독의 정책과 비교해보니… 남한의 통일정책, 준 만큼 성과 못얻어 ▼

“콘라트 아데나워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독일 통일정책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빌리 브란트가 공헌해 만들어진 ‘동방정책’의 비전을 통합적으로 구현해 독일을 통일로 이끈 사람은 헬무트 콜이었습니다.”

위르겐 클림케 독일연방 하원의원(기민-기사연합)은 8일 서울 중구 서울프라자호텔에서 열린 독일 통일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지도자 세 명을 언급했다. 실제로 서독의 통일정책은 세 지도자를 거치며 ‘정반합(正反合)’의 원리에 따라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우파 기민당의 아데나워 총리(1949∼1963년 재임)는 ‘힘의 우위 정책’을 폈다. 미소 냉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통일보다는 미국 등 서방공동체에 참여해 독일의 주권을 되찾는 것을 우선시했다. 서독만이 전 독일을 대표하는 유일 합법정부임을 천명하고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소련 제외)와는 국교를 수립하지 않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이어 집권한 좌파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1969∼1974년 재임)는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 원칙에 입각해 동독뿐만 아니라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뜻하는 ‘동방정책’을 시작한 것이다. 1972년 동서독은 상호 통행을 허용한 ‘통행조약’과 상호 선린관계를 발전시키기로 한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실용주의 통일정책을 표방한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 총리(1974∼1982년 재임)에 이어 정권 교체에 성공한 기민당의 콜 총리(1982∼1990년 재임)는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동독에 경제적 지원은 하되 이에 상응한 인도적 화답을 요구하는 상호주의 정책을 바탕으로 교류협력을 크게 확대했다. 이는 동독의 변화를 촉진하는 한편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우에서 좌로, 다시 우로 이어지는 통일정책의 변화 과정에서 치열한 내부 논쟁이 발생한 점은 남한과 유사하다. 아데나워의 정책이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 정부와 유사하다면 브란트의 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상호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콜 정부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남한의 통일정책은 서독보다 성과가 적다는 평가가 많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을 통해 막대한 경제지원을 하고도 북한의 핵 개발을 막고 인권을 개선하는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도 임기 절반을 넘긴 현재까지도 대북 상호주의를 정책으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유사한 통일정책의 성과에 간격이 큰 이유는 두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구조적인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독일도 한국도 외세에 의해 분단됐지만 동서독은 서로 싸우지 않았고 남북한은 6·25전쟁의 비극을 겪었다.

북한이 동독과 다른 점도 많다. 동독은 붕괴 직전까지 집단지도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 당-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북한보다 개방적인 사회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었다. 그러나 북한은 건국 이후 기형적인 1인 독재 국가로 변했고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독일 전문가들의 조언 “햇볕정책만으론 북한 변화 못시켜”
“중국과 협상없인 통일 쉽지않을 것”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국제 관계와 남북 관계, 나아가 북한 내부까지 두루 살펴 고민하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독일인들은 강조했다. 다음은 현지에서 만난 독일인들의 조언.

“한국은 독일처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나라가 아니다. 따라서 남북이 통일한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간섭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누구와 협상해야 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아마도 중국과의 협상 없이 통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엄청난 돈을 줘 ‘빅딜’을 했다. 통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한스 크리스티안 라이프니츠 독일 외교부 공보국장)

“햇볕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목적으로 했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이 지원하는 식량은 굶주리는 일반 주민보다는 북한을 움직이는 각종 중요 핵심기구에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변화는 북한 내부로부터 나와야 한다. 남한이 지원을 통해 북한 정권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 정부의 희망일 뿐이다.”(동독 오베르하펠 지역 전 부책임자 미하엘 나이 씨)

“서독은 통일 전 동독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교류를 했는데도 통일 후 굉장히 힘들었다. 한반도는 지금 교류조차 안 하고 있다니 걱정이 크다. 분단 기간도 한국이 독일보다 길다. 다만 통일비용은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 높여줄 것인지를 결정하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카르스텐 포크트 전 독일-소비에트프렌드십그룹 의장)

베를린·라이프치히=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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