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기’만 잘한 유학생, 美대학선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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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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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T 고득점 받고도 대학생활 고전하는 이유

한국어학원 ‘족집게’ 강의로 입학기술만 발달
“SAT는 비판적 사고력-문제해결방법 측정 시험”
한국학생 정보분석-논리적 의사표현능력 떨어져

《‘미국 명문대로 유학 간 한국인 학생 중 44%가 중도에 그만둔다.’
2008년 각 언론에서 주요 기사로 다룬 내용이다.
최근 이 기사의 근거가 된 재미교포 박사 논문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란도 있지만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최근 경찰에서 미국대학수학능력시험(SAT) 시험지 유출 사건을 수사하면서 ‘국내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유학을 준비하기 때문에 적응에 더 힘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합격할 때까지는 좋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A 씨(20)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고2 때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다. 학교는 미국에서 다녔지만 방학이면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강남에서 어학원을 다녔다. 남들보다 빨리 그것도 명문대에 합격한 A 씨는 큰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A 씨는 “수업을 따라가려면 문자 그대로 ‘침대 한 가득’ 책을 읽어야 하는데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요점 정리와 논리 구성이 힘들어 발표 준비도 엉망이었고 학교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A 씨는 현재 대학을 휴학하고 교포가 운영하는 식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낸다. 방학 때에 맞춰 한국에 와 있는 그는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싶지만 주변 눈치 때문에 못 돌아가는 상황”이라며 “군 입대에 맞춰 한국에 돌아가 자리를 잡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A 씨가 한국에서 다녔던 학원은 ‘족집게’로 유명한 곳이었다. A 씨는 “한국에서 학원에 다닐 때 ‘SAT는 영어 실력 더하기 찍기 기술’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A 씨는 SAT에서 2200점(만점 2400점)을 받았다.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찍기’ 위주로 공부한 경우 미국 명문대 진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적응하기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SAT의 원래 취지대로 비판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찍기’ 위주로 공부한 경우 미국 명문대 진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적응하기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SAT의 원래 취지대로 비판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시험 구성이 미국 대학 생활 반영
SAT는 크게 논리력을 평가하는 SAT Ⅰ과 전공에 따라 시험을 보는 과목별 시험 SAT Ⅱ로 나뉜다. SAT Ⅰ은 비판적 읽기(Critical Reading), 수학(Mathematics), 쓰기(Writing)로 구성됐다. SAT Ⅰ이 이렇게 세 영역으로 구성된 것은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을 검증하기 위해서다.

SAT를 주관하는 칼리지보드(The College Board)에서는 “SAT는 특정한 지식을 물어보는 시험이 아니라 전 세계 학생들에게 문화적 배경과 인종 차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력(Critical Thinking)과 문제해결방법(Problem-Solving Skills)을 측정하는 표준화된 시험”이라고 설명한다.

미국 대학 생활은 많은 자료를 읽고 자기 논리를 세운 뒤 보고서(Paper)를 내거나 발표(Presentation)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비판적 읽기는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정보를 얼마나 정확히 분석적으로 이해하는가’를 평가한다. 쓰기는 ‘논리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능력’이 평가대상이다. 수학은 논리의 기초다.

한 어학원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SAT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찍기’ 노하우가 발전해 찍기 실력만으로도 좋은 대학에 보낼 수준에 올랐다”며 “하지만 이렇게 진학한 학생들은 영어능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충분히 기르지 못해 학업 수행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판적 사고력이 제일 중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비판적 읽기와 쓰기에서 점수차가 난다. 비판적 읽기는 섹션에 따라 20분 또는 25분을 주고 학생들이 여러 지문을 읽고 해답을 찾도록 구성됐다. 산술적으로 1문제를 1분에 풀어야 하기 때문에 지문을 다시 읽을 시간이 거의 없다. 문단마다 글의 핵심을 바로 요약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를 풀기가 까다롭다. 쓰기에서는 에세이에서 점수가 갈린다. 25분 안에 설득력 있는 글을 쓰려면 논리적 사고가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국내 한 특목고를 졸업한 뒤 미국 명문대와 로스쿨을 졸업한 B 씨(29)는 “SAT는 암기한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논리 흐름을 묻는 시험”이라며 “객관식 시험에 길든 한국 학생들은 체계적인 준비로 문제의 논리를 찾아낼 수 있는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시험지 유출이나 ‘찍기’로 한국 학생들의 점수 부풀리기가 계속되면서 미국에서도 한국 학생의 실제 학습 능력 검증에 나섰다.

SAT 시행 기관인 미국교육과정평가원 한국지사(ETS 코리아) 관계자는 “미국 ETS에서 조만간 부정 방지 대책을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라며 “부정행위가 계속되면 미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 전체가 낮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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